【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63) 하늘 성소(Heavenly sanctuary)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경우에 신전은 하늘의 실재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신전은 하늘에 있는 신전의 지상 모형이었다. 후자의 신전은 신이 통치하는 세계를 상징했다. 이러한 개념은 바벨탑 이야기에 잘 반영되어 있다. 야곱의 사닥다리도 마찬가지다. 야곱은 벧엘이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임을 깨달았다.

히브리서에서 현재의 참된 성막이 오직 하늘에만 있음을 강조한다. 이사야 63: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지성소는 비가시적인 하늘의 성소와 하나님의 보좌를 표상한다. 이 장소는 하늘의 차원이 지상 세계에까지 확장된 실제적인 장소요, 이사야의 용어를 빌리자면 언약궤를 가리킴이 분명한 그분의 발등상이다. 그리스도께서 보좌에 앉아 있는 하늘들은 참 장막이며 보좌 위의 왕은 동시에 하늘 성소에서 섬기는 대제사장이신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대제사장직과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왕에 관한 주제를 연합한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예수님이 좌정하심은 오직 그의 왕적 대제사장 직무와 연결된다.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라는 어구는 죽임당한 아들이 최고의 영예의 자리로 높아져 대제사장으로 통치하심을 주장하는 시편 110:1, 4의 형식을 상기시킨다.

 

1. 그리스도는 왕적 대제사장으로 하늘 성소에 들어가다

하늘의 성소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땅의 장막 사이의 대조는 히브리서 8-9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땅의 장막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자기 피로 단번에 하늘 성소로 들어갔다. 땅의 성막은 꽤 정교한 장막인데, 이스라엘 하나님이 자신들 가운데 임재 또는 현존하는 상징으로서 그것을 만들도록 명령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의 장막을 세울 것을 명령하기는 했으나 친히 세우지는 않았다. 그러나 참된 장막은 친히 세우셨다. 하늘의 성소는 참된것으로 언급하고, 지상의 성전은 그림자혹은 모형으로 언급하면서 저자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그 성막이 참된 하늘 성소의 모형이라고 진술한다. ‘성소장막은 같은 실재다. 구분이 있을 때 전자는 대제사장이 들어간 내부 성소를, 후자는 성막 전체를 의미한다. 히브리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구별을 지킨다.

제사장은 필히 하나님께 구하러 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기 위하여 자신이 거주할 성소를 갖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자신의 성소를 하늘에 갖고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분을 찾을 수 있다. 거기에서 그분은 우리를 영접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도록 중재한다. 거기에서 그분은 자신이 계속 거하는 대제사장이란 사실을 증거하며 자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임재 안에 계속 거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영접하여

하나님을 만나도록

중재하시는 대제사장

히브리서가 성전보다 성막을 강조하는 것은 출애굽기에서 성막의 전체적인 모양과 그곳의 비품들이 훨씬 더 상세하게 묘사되는데다가, 구약에서 성막은 성전보다도 하늘의 양식과 더 분명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님의 온전함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구약에 근거시킨다. 저자는 이스라엘 광야 시대 성막이 더 나중에 있을 성막을 통해 완전해질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그 옛 성막에 대한 구약의 묘사를 주목한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본 양식은 참된 하늘 장막이다. 이것은 나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내려와서 마침내 온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모세는 바로 이런 종말론적인 성소에 대한 소형 지상 모델을 만든 것이다. 종말론적 성소는 참된 물품이요, 문자적이면서 진정한 것이기에 참 장막이었다. 이처럼 성막은 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보여준 하늘 성소의 모델이나 양식을 따라 건축되었다. 저자가 8장과 9장에서 지속적으로 장막에 대해 언급하는 것에 주의해서 보라. 저자는 아론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참 장막을 언급한다.

예루살렘의 지상 성전에 서 있던 이사야는 야훼가 우주의 왕으로 좌정하신 하늘의 성전으로 자신이 옮겨진 것을 발견한다. 지상 성전에서 행해졌던 합창, 제단에서 분향, 그리고 왕으로서의 야훼의 환호들은 하늘 성소에서도 계속된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일치하는 덕분에 하늘 성소의 보좌에 앉으신 왕은 또한 이 땅의 성전에 거하신다. 이 이중적인 의미에서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2:20) 성전은 하나님의 상징적인 왕궁이었다. 그것은 성막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처였다. 옛날의 성전은 바깥 뜰에 모인 예배자들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궁이었다. 그의 개인적인 자유는 성전의 거룩함에 의해 보호받았다. 대제사장으로 승천하여 하늘 성소에 들어가신 왕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성소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자신의 궁에서 사시는 것과 다름이 없다.

민수기 24장에 반향된 것처럼 이런 왕적 대제사장 개념은 그리스도를 창조 세계에 대한 아담의 인간 부섭정 지위에 속한 자들의 초기 성취로 묘사하는 히브리서 설명과 관련되는 듯하다. 다른 신약의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저자 역시 그리스도의 오심은 마지막 시대의 시작이며,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활동의 절정이라고 믿으며, 그리스도가 장차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 구원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 즉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2. 왕적 대제사장 그리스도는 하늘 성소에서 섬긴다

우리와 독자들은 새로운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른 대제사장직 아래에서 살아간다. 또한 이 새로운 대제사장직은 옛 제사장직보다 훨씬 탁월하다. 그분이 행사하시는 하나님 우편에서의 통치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의 섬김을 힘입어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기 때문이다. 저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시며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왕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왕적 대제사장 직무 역시 반드시 하늘에서 수행되어야 하며, 그러므로 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안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추론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조적인 고백과 찬송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아들이 좌정하신 개념에 익숙하였다. 그들이 그러한 언급이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승천으로 높아지심에 대한 것으로 즉시 인식했을 것이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호소가 거의 없는 것이 이러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통해 새 시대가 도래했다. 그분은 하나님 앞으로, 즉 하늘 성소와 참 장막으로 들어가셨다. 땅에 있는 장막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장막이다. 그리스도의 하늘 삶이 있는 하늘은 모세가 지은 장막의 원형이다.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는 대제사장 되신 왕으로서 성소, 즉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참 장막의 섬기는 자로서 계시된다. 하늘의 장막은 이 땅의 장막보다 훨씬 더 좋다. 예수님께서 들어간 장막은 이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하늘에는 공간적 개념의 장막은 없다. 하늘의 장막이라는 말은 도무지 묘사가 불가능한 하나님 현존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히브리서는 하늘의 예루살렘에 관하여 말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히브리서는 레위 계열의 대제사장들은 지상의 성막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였던 것에 반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그리스도는 하늘 성소에서 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한다. 머레이(A. Murray)는 우리들의 모든 실패와 연약함에 대하여 히브리서가 갖고 있는 치유책이자 모든 위험과 병적 상태에 대한 단 하나의 예방책은 하늘의 성소에 계신 왕적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 말한다.

히브리서나 전체 신약성경에서 하늘’(heavenly)이라는 말은 더 직접적인 하나님과의 접촉을 의미하며, 따라서 지상적이고 잠정적이 아니라 영속적이고 불가견적 하나님을 접촉함을 말한다. 마치 하나님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감지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떤 면에서 장차 올 세상인 하늘 성소는 히브리서의 주제다. 소망, 특별히 그리스도교적 소망의 대상은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다.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에 상응하는 인간편에서 반응이다.

히브리서는 하늘 성소와 하늘의 대제사장 직무를 이원론적인 어휘로부터 연유한 용어들로 규정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9:24). 그리스도의 하늘 삶이 있는 하늘이 모세가 지은 장막의 원형으로서 보좌 위에 계신 그리스도는 대제사장되신 왕으로서 성소, 즉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참 장막의 섬기는 자로서 계시된다. 섬기는 이에 해당하는 레이투르고스’(leitourgov")는 어떤 형태로든 공적인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말이다. 이 말은 대부분 하나님을 향한 봉사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섬기는 이라고 해 놓고, 곧 이어 그의 위치를 하늘에서의 지존한 왕의 자리로 표현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시며

지존하신 왕이신 예수님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성소의 섬기는 자로서 세상에서마저 우리가 하늘의 예루살렘의 성도들처럼 살 수 있게 하며 하늘 성소의 축복인 하늘 삶의 영과 능력을 나눠주시는 분이다. 나아가 하늘 대제사장이신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늘은 날마다 우리에게 열리고 우리는 새롭고 살 길을 통하여 그리로 들어감으로써 성령께서 그 하늘을 우리 안에 임하게 하신다는 것이 히브리서가 주는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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