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68) 믿음의 주(The Pioneer of Faith)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히브리서는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여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말하거나, 예수님이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길을 인도하는 안내자로서의 역할를 하는 것을 말할 때 특징적인 용어들을 많이 사용한다. 이러한 첫 번째 용어가 에 해당하는 아르케고스(ajrchgov"). 믿음의 창시자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혈과 육을 공유하며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며 믿음의 경주를 마치신 분이다. 둘째로, 믿음의 창시자로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하여 자기 형제와 자매들보다 먼저 하나님 보좌에 앉으셨다.

예수님은 독자들의 믿음의 창시자이며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인 고대인들만이 멀리서 볼 수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얻은 최초의 사람이다. 이는 그는 하늘에 있는 목표를 향해 믿음의 과정을 처음으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고통 속에서 충실한 복종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것은 전례가 없고 결정적이었으며, 단순한 모범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 길을 열어 주시고 우리가 그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게 해주셨다. 또한 그에 대한 메시지가 믿음을 불러일으키므로 그는 믿음의 원천이다. 그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서 우리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그분이 창시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1. 예수님은 믿음의 선구자이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믿음으로 사셨다. 그의 신성과 인간 본성의 신비는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심오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하루하루를 살았기 때문에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어야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고 한다. 저자는 예수님을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앙의 경주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들어간 신앙의 궁극적 본보기로 제시한다. 그는 확고한 믿음의 최고 본보기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최고 모델이자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본보기이다. ‘그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해그는 경주에서 승리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다. 하늘로부터 땅, 죽음과 부활, 승리로 그리스도의 이동을 아들의 길로 불러왔다. 그리고 히브리서가 다양하게 사용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견인의 결과를 설명함으로써 박해 아래서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한 권면을 그분의 높아지심에서 절정이 제공된다.

육상에서 앞서 가신 이는 도보 경주에서 선두 주자를 가리킨다. 결승선을 그대로 통과한 것은 예수님이 처음이다. 예수님은 믿음의 길을 개척한 사람으로, 승리의 결승전까지 친히 믿음의 경주를 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결승선을 통과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믿음의 개척자이신 예수님을 향해, 예수님을 위해,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달리는 경주자들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참고 인내하는 이유는 예수님과 연합하며, 그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는 복에 참여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경주 비유를 염두에 둔다면 저자가 독자들에게 이제 하나님의 오른쪽(12:2)에 앉은 선구자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인내심을 갖고 삶의 경주를 달리라고 촉구한다. 경주에서 경쟁하는 선수들은 그들이 달리고 있는 목표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어떤 경기에서도 결승점만을 바라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저자는 이 사고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저자의 호소는 예수님만을 향한 시선으로 모든 산만함을 외면하는 집중적인 관심을 요구한다. 우리의 시선을 예수님에게 고정하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의 근원과 모범이며 대상이기 때문이다.

바라보자직접적인 주변 환경에서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헬라적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독자들은 다른 모든 것을 외면하고 예수님께 집중해야 하며, 인도와 도움을 받기 위해 예수님을 응시해야한다. 독자들이 응시할 대상은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인간 예수님이다. 이것은 단호하게 다른 존재들에게서 눈을 떼고 예수님을 응시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동시에 두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마카비 시대의 순교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서 고문과 죽음까지도 견뎌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을 응시함으로

고문과 죽음까지도 견뎌 낸

순교자들

독자들이 기대하며 응시하는 예수님은 미래의 보상을 바라며 현재의 고난을 참는 본을 보인 분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해야 한다. 방해하거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경주자는 자기가 달리고 있는 목표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경주자가 목표 지점을 알아야 하듯이, 영적 경주자인 독자들은 믿음의 경주에서 가장 완벽한 모범에 시선을 고정시켜야 한다. 독자들은 고난이 있는 세상에 시선을 두지 말고, 하찮은 성공과 수많은 실패를 겪는 자신도 바라보지 말고, 모든 영적 활력의 원천이며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에게 시선을 두어야 한다. 신자들이 믿음과 인내심을 갖고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첫 번째 격려가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면, 인내하는 최고의 격려는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2. 우리는 믿음의 선구자이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저자는 믿음의 방향뿐만 아니라 종반에 대한 믿음의 보상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창시자완성자라는 묘사는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다. 이 두 가지는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예수님의 활동의 전체 범위를 포괄한다. 시선을 응원객같은 허다한 증인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만 유일한 구원자요 신앙의 창시자이자며 완성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이 목적지에 이르셨기 때문에 단지 믿음의 아르케고스가 되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완성자이시기도 한다. 기원과 완성, 시작과 끝의 개념에 대한 저자의 관심에서 볼 때, 믿음의 주와 온전케 하신 예수님은 믿음의 질서의 반열에서 머리요 선구자이심을 암시하다. 그가 신앙의 개척자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코스를 완주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온전케 할 수 있다. 그는 십자가를 참으심으로 믿음을 온전케 하셨고, 이제는 가장 높은 곳에 들림 받아 계신다. 구원의 주가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셨고, 그럼으로 해서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앉으셨다.

그러므로 히브리서는 앞서 가신 이와 아르케고스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길을 준비하는 사람의 유사한 생각을 전달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제사장을 따라 지성소로 들어가는 자는 없었다. 그는 혼자서 갔다. 대조적으로, 그리스도는 믿음의 선구자다. , 그는 다른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준비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셨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에게 담대함을 준다. 예수님의 왕적 대제사장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자세히 보여주려고 한다.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사역은 그리스도인들의 세상살이를 지탱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지탱하는 보증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 가장 큰 위로를 받는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시고 그 후 시편 110편을 성취하는 데 있어 탁월한 왕적 대제사장으로 높이셨듯이, 독자들은 같은 원칙을 따르길 기대해야 한다. 고난은 영광으로 이어진다.예수님을 바라보자라는 지침은 규정된 코스의 목표지점에 자신의 눈을 고정시켜야 하는 경주자의 비유를 유지한다. 예수님은 마지막 지점인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주자처럼 믿음의 아르케고스이신 예수님이라는 목표에 강력하게 집중해야 한다. 저자가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자고 할 때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이 아니라 끝까지 고통과 수치를 인내로 승리를 쟁취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명예와 영광을 얻으신, 즉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왕적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시다.

 

믿음의 아르케고스이신

예수님께 집중하자

저자는 독자들이 땅이라는 현실에 흡수된 자기 연민에서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라고 촉구한다. 그가 높임을 받은 하나님의 보좌는 그가 자기 백성의 선구자로서 먼저 가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다. 그것은 믿음의 길을 걷는 사람들의 목적지다. 선구자이신 예수님이 거기에 먼저 도착해 계시지만 동일한 신앙의 경주에서 이기는 자들에게도 그와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것은 예수님이 참아낸 배척과 적대적 상황이 두드러진 역전을 형성하면서 치욕적인 죽음과 대조를 이룬다. 보좌 등극은 수난의 수용에 대한 보상으로서 획득한 것이며 그것은 보상을 형성한다. 십자가는 영광과 연결된다. 십자가는 단 한 번도 그 자체로 끝이라고 간주된 적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그것은 승리 대신에 비극을 제시할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인내를 강화시키는데 있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것은 고난 받는 백성에게 큰 의의를 갖는다. 대제사장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통치하는 왕이다. 왕적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모범과 그것의 결과는 그 고난을 감수하고 신실함으로 참아내는 공동체를 격려하기 위해서 강조된다. 우편에의 좌정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의 절대적인 보증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소망을 두었던 사람들의 전적인 보증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만 집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적대감을 당면하든지 견뎌낼 수 있는 힘을 부어주실 수 있다. 또한 그는 죄를 단호하게 다루어 희생제물을 바칠 대제사장으로서 또한 기능한다. 새 언약의 백성에게 새로운 살길을 연 것이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가 그들의 시선을 어디에 두고 집중하느냐에 따라 경기의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독자들은 물론이고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 정확하게 적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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