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73) 복음의 씨앗(Jesus’ seed of Godpel)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 평안의교회(서울서부노회) 담임목사

시인 윤동주는 눈감고 간다는 작품에서 사명의 길을 걷는 자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 밤이 어두웠는데 / 눈감고 가거라 // 가진 바 씨앗을 / 뿌리면서 가거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마치 씨를 뿌리는 농부와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주변이 한창 씨를 뿌리는 농경기일 수 있다.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이 농사에 대한 경험이 있거나 농사를 지었던 농부 출신이 상당히 있을 수 있다.

예수님은 비록 목수의 일을 하였지만 얼마든지 집안일을 도와 농사의 일을 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자급자족 시대이기에 충분히 화자 자신이나 청자들이 농사에 대해 사전지식이 있었다고 사료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주변 이야기를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풀어가는 데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려운 이야기를 복잡하게 풀어가면 서로 피곤하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 오시는 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를 통해 진리를 보고 듣고 깨닫게 하시길 원하신다.

씨를 뿌리는 비유는 한 가지 목적을 지향하게 한다. 파종과 성장, 그리고 수확 가운데 어느 것이겠는가? 비유 가운데 성장의 모습도 보인다. 수확의 현장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세 마리 토끼를 쫓을 생각은 무리다. 셋 중에 어디에 포커스를 맞출 것인가? 네 가지 종류의 지역에 뿌려지는 파종은 공통분모이다. 길가는 파종과 수확과 거리가 멀다. 돌밭과 가시밭은 성장은 어느 정도 있어도 수확과 거리가 멀다. 결국 파종은 기본이고 성장과 수확을 다함께 볼 수 있다고 할 때 가장 공통분모가 많은 것인 파종이 비유의 주된 강조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을 때 어떤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느냐에 초점을 맞출 것 아니다.

 

1. 씨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전할 때 예상했던 장애물은 어떤 것이 있었는가?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들은 아예 귀를 막아 버려 아스팔트 위에 떨어진 씨처럼 반응을 했다. 벽창호가 따로 없다. 아무리 눈을 의심할 기적과 이적을 보고 들어도 그들의 마음은 철옹성처럼 닫혀 있다. 마음은 화석처럼 굳어져 있다. 귀신을 내쫓는 것을 눈앞에서 보고도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오해하고 비방하였다. 처음에는 그토록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오병이어의 빵을 요구하였다가 생명의 떡에 대한 말씀을 듣고 이해하기 힘들다, 어렵다고 다 떠나고 다시는 따르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6:66).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상을 해도 너무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예수님께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뿌리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시고, 마지막 한 알의 밀알처럼 자신을 주셨다.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여러 종류의 땅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행위에 있다. 비유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열쇠는 파종의 행위이다. 땅에 씨를 뿌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대 가운데 돌입하는 것을 말한다. 어두움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할 때 거부하거나 반짝 환영하다 등을 돌리는 자들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 관심사가 아니다. 요점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到來)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이다. 하나님의 역동적인 행위가 중심이다.

 

씨 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여러 종류의 밭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동적인 행동

씨를 뿌리는 자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하는 비유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씨를 뿌리는 농부는 자기의 씨앗을 땅에 뿌렸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기 위해 예수님이 보내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말씀하시고 방향잡이로 삼는다(4:43). 말씀은 곧 씨를 뿌리는 자의 말씀이다. 씨를 뿌리는 자가 농부이면 농부의 씨가 될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농부이신 그리스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위해 부지런히 뿌리므로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펼쳤다.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뿌리는 자, 즉 전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전하려는 목적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다. 가르치는 존재, 전하는 존재, 설교하는 자이다. 비록 환경적인 방해로 열매로 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할지라도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였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gospelimages.com/theartist/ Jan van 't Hoff
이미지 출처 : https://www.gospelimages.com/theartist/ Jan van 't Hoff

 

2. 씨 뿌리는 자와 밭

두 나그네가 먼 여행에 나섰다. 그들의 이름은 진실거짓이었다. 둘은 길을 걸으면서 가져온 꽃나무 씨앗을 주변에 뿌렸다. 거짓은 온 천지에 마구 씨앗을 뿌렸다. 거짓은 뛰어가면서 진실에게 어서 오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진실이 말했다. “토양과 기후가 나무의 생육에 적합한지 따져 씨앗을 심고, 심은 후엔 흙으로 덮고 물을 주느라 천천히 갈 수밖에 없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농부라는 직업을 말씀하지 않고 마치 직업을 풀어서 설명하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쉽게 접근하고자 한다.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어린 아이를 모델로 내세운 것처럼 그냥 농사짓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표본이 아니라 말씀하지 않으시고 씨를 뿌리는 자가 하나님 나라라고 말씀하신다. 일반적으로 농사를 생각할 때 먼저 밭을 일구어 준비하는데 그런 준비는 언급하지 않는다. 파종보다 씨를 흩뿌리는 농사법을 접하게 된다. 잘 일구어진 밭에 밭고랑을 내고, 아니면 구멍을 내고 씨를 심는 광경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 비유는 씨를 뿌리는 자이다. 씨를 심는 것이 아니며 모종을 심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씨를 마냥 땅에 흩뿌리는 농부를 생각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게 된다. 주체는 씨를 뿌리는 농부에게 있는 것이지 땅에 있지 않다. 눈에 보이는 땅의 종류가 네 개 혹 다섯 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땅이 농부가 뿌린 씨앗을 받아들이는 반응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이 초점이 아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는 땅이 과거 길이었는지, 돌멩이가 숨어 있는지, 앞으로 씨앗이 자랄 때 가시떨기가 같이 자랄지에 대해 크게 신경을 안 쓰는 분위기이다. 씨를 뿌리는 것에 농부의 역할이 전부인양 보인다. 그 다음에 땅이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차후의 문제인듯하다.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다보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 반대, 어려움에 좌우될 때가 많다. 밭이 중심이 아니며, 밭의 반응에 예민해서도 안 되며, 얼마나 많은 수확이 있느냐에 따라 감정의 기복이 널뛰기를 해서는 안 된다. 씨를 뿌리는 자가 하나님 나라의 비유이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씨 뿌리는 사람에게 있어

3. 하나님의 말씀과 뿌리는 자

이제 씨를 뿌리는 자는 뿌리는 그 씨에 대해 생각해 보자. 농부는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밭에 뿌린다. ‘그 씨는 무엇인가? ‘는 정관사 ‘the’일까 아니면 혹 2인칭 소유격 그의(his)’일까? NIV를 보자. “A farmer went out to sow his seed.” 분명하게 씨를 뿌리는 자는 농부라고 일반명사를 사용하고 있고, 씨는 농부의 씨앗이라고 소유격을 확실히 명시하고 있다. 하늘의 하나님에 의해 모든 권세를 부여 받은 그 사람의 아들 자신, 장차 오는 세상에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자, 바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좋은 소식을 이 땅에 가져 올 수 있는 모든 권세를 부여 받은 그 사람의 아들이다.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실 자이다(7:14). 바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는 자이다. , 가시, 인간들이 부분적으로 아들의 일을 방해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감추어진 특성은 심오하다. 왕 자신은 밭에 씨를 뿌리는 농부처럼, 때로는 종처럼 온다. 고난의 종으로 자신의 생명까지 대속물로 내놓아야만 한다.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었다.

씨 뿌리는 비유를 읽거나 보면서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가? 우리의 관심이 어디를 주목해야 하는가? 수확을 하지 못한 곳인가? 씨앗의 손실이 얼마인가를 셈할 것인가? 아니면 비록 수확으로 이어가지 못하는 일이 있고, 파종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30, 60, 100배의 결실을 바라보고 파종하는 것을 염두할 것인가? 물론 실패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어떤 종류의 세력에 의해 위협과 방해를 받는데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거부하고 방해받고 숨막히는 일들이 속출해도 씨앗이 작용하여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놀라운 사실은 제자들조차 간과할 수 있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의도는 제자들의 눈이 열리고 귀가 뚫려 그리스도와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을 보게 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비전을 새롭게 하고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으로 사역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씨를

이 땅에 뿌리시는 예수님

농부가 막연한 종자가 아닌 자신의 씨앗을 특별히 준비하여 땅에 뿌렸다. 농부는 자신의 씨를 갖고 가서 밭에 뿌렸다. 그렇다면 농부의 씨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씨를 갖고 밭에 나가 뿌리는 농부와 같다. 농부는 그 씨의 주인이자, 씨를 뿌리는 일꾼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씨의 주인인 하나님이자, 씨를 뿌리는 농부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이 땅에 뿌리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대리인이다. 자신이 하나님이면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는 대리자로서 이 땅에 씨를 뿌리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키워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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