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위한 희생에 램프를 든 여인 나이팅게일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간호사는 누구였을까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인간 역사를 살아가며 서로 돕고 나눔은 중요하기에 때론 서로 다툴지라도 최초 커뮤니티를 이루며 살 때부터 서로 돌봄 식 간호 역할은 마치 어머니가 본인 뱃속에서 태어난 어린아이 돌봄 식 사역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뵈뵈는 이에 언급된 최초의 유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커플을 위한 사역 위해 임명하기 바로 전에 그를 교회의 섬기는 집사로 임명합니다. 이는 자선과 이타심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이상을 본보기로 삼았다고 보아지며 그녀는 자신의 거처의 지붕 아래에서 아픈 낯선 사람, 고아 및 여행자를 잘 돌 보았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 16:1-2)

 

현대/근대 간호의 대모 및 창시자로 불리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 Florence Nightingale(1820-1910)의 신앙은 미국 회중 교회의 목사이자 교육자인 제이콥 애벗(Jacob Abbott)의 책, 특히 그의 모퉁이 돌, 또는 1834년에 그녀가 친구에게 '나를 변화시킨 책' 등 그녀는 복음적인 기독교인으로 그 시대에 알맞게 부름을 받은 자였습니다. 그녀의 인생 후반기에 들어서는 학교에서 가르치기에는 너무 아프긴 했지만, 간호사와 병원 관리자의 교육은 그녀의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 되었습니다. 플로렌스는 질병 예방의 확고한 옹호자였으며 정신 건강, 교육(보건 교육 포함) 및 공중 보건에 대한 솔직한 옹호자였습니다.

어제는 필자가 반세기적 가족 간의 중요한 덕담 어린 만남을 나누며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성 토마스 병원을 다녀왔으며, 그곳에 위치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박물관을 다녀왔다. 여기에서 본인도 좀 이상한 점은 그녀가 너무 많은 신용을 얻거나 또는 너무 적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크림 전쟁에서 '램프를 든 여인만'으로 짧은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표현이며,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잘 알려진 기간, 즉 그녀가 실패로 여겼던 기간 이후에 성취한 모든 것에 대하여 유산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20년 곧 금년도로부터 202년 전 그녀의 이름을 딴 이탈리아 도시의 Florence에서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곧 언어와 수학에 뛰어났습니다. 이러한 성취는 그녀가 식탁에서 부모와 나누는 자극적 철학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도움이 될 뿐이었지만 경력으로 이어지기 위한 것은 아니었고 그녀는 더 많은 것을 갈망했습니다. 플로렌스의 간호는 초기 관심이었습니다. 당시 많은 소녀들처럼 플로렌스는 인형을 돌보았지만 나이가 들면서도 가족의 더비 주 부지에서조차 병자들을 돌보기도 했으며 종종 침대 옆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녀는 이미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이론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16세에 일찍이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했고, 처음에는 그것이 어떤 형태를 취할지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직업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결국 그녀를 간호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플로렌스가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가족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당시 간호사에 대한 고정관념은 마치 술에 취한 여자, 다른 일을 하기에 부적합해서 병자를 간호하는 여자였으며 다른 종류의 간호사는 수녀뿐이었다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들 중 어느 것도 잘 자란 젊은 여성에게 적합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불행히도 그녀의 부모에게는 세련되고 지적인 삶이 플로렌스에게 많은 독립적인 여성의 예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으뜸적인 삶으로의 George EliotElizabeth Gaskell을 알았고 최초의 여성 사회학자인 Harriet Martineau와 의사로 졸업한 최초의 여성인 Elizabeth Blackwell과 평생 친구가 되었습니다. 유럽 대륙을 여행하는 동안 플로렌스는 제대로 훈련된 간호사가 있는 잘 운영되는 독일 병원을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의 반대가 플로렌스를 우울증에 빠뜨렸습니다. 그녀는 자살 충동을 느꼈고 아침에 거의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결혼(여성의 경우)이 행동하는 삶과 양립할 수 없다고 믿고 여러 구혼자들을 외면했습니다. 결국 플로렌스의 정신 건강이 걱정되어 그녀의 가족은 그녀가 독일에서 간호를 배울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따라서 플로렌스는 지속적으로 본인이 원했던 간호사 훈련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플로렌스는 크림(크름) 반도의 간호 사역으로 이름을 남기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에 6.25. 전쟁이 종료되던 해인 1953년보다 100년 전에는 영국 프랑스와 함께하는 연합군은 무력적인 러시아를 대항하여 크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영국은 1854년 초에 크림 전쟁에 참전했지만,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조직도 열악했었습니다. 군 공급망의 행정적 실패는 인명 손실을 크게 증가시켰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하는 조건도 가혹했습니다. 이 상황이 영국 대중에게 알려지자 반발이 일어났으며, 이에 플로렌스의 친구 시드니 허버트(그의 아내 엘리자베스가 연구소의 직책을 맡게 됨)는 그녀에게 간호사 원정대를 이끌도록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마침 플로렌스도 이미 엘리자베스 허버트에게 같은 것을 묻기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플로렌스는 그녀의 부름이 선을 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희생하는 것이라고 믿음에 의한 행동의 법칙을 깊이 있게 느끼며 신앙의 길로 접어들며 그 젊은 신앙의 정신은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녀의 합리주의는 그녀를 행동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녀는 신비로운 경험을 추구하기보다는 선을 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희생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을 통한 사역을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속국이었던 영국인들이 인도를 잘 관리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인도인들이 자신들의 일을 스스로 처리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점점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말년에 그녀는 인도 독립을 위한 활동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고 그녀의 명성과 사회적 인맥을 이용하여 자신의 대의를 발전시키는 데는 멀리하고 다른 정치인을 영향력 있는 자리에 추천하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설립된 공적 기금마저도 사용하여 세인트 토마스 병원에 부속된 영국에서는 최초의 간호사 전문 훈련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그녀는 별도의 병동과 많은 창문이 있는 고전적인 빅토리아 시대 병원 건물의 모델을 주도했습니다. 그녀는 또한 매우 인기 있는 간호 노트를 포함하여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세균 이론이 확립되자 그녀는 수술 중 소독 기술의 사용을 장려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건강이 좋지 않아 아파트에 갇혀 있는 동안 이 모든 것을 성취했습니다. 플로렌스는 결국 육적 건강이 회복되었고 1880년대에 드물게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지만 곧 노년의 모습으로도 건강도 관리하며 성실한 시간을 보냈었지만 점차 장님이 되었고 말년에 그녀의 마음은 가끔 방황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1907년 명예 훈장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으며 1910년에는 90세의 연세로 하늘나라를 향했습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좌우명 곧 '램프를 든 여인'의 간호와 삶에 관한 유용 하며 본이 되는 자세로 적힌 글을 나눕니다. 이처럼 '램프를 든 여인'으로 알려진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간호에 혁명을 일으키고 병원을 개혁했습니다. 그녀는 무기력하고 비참한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크림 전쟁 기간 동안 군인들의 진정한 여주인공이었던 그녀는 밤에 거의 잠을 자지 않고 대신 군인들의 건강을 보장하기 위해 병원을 순회했었으며 이는 그녀를 위한 상징적 칭호가 된 이유입니다.

 

다음은 이 영감을 주는 간호사의 간호와 삶에 대한 몇 가지 인용문입니다.

1) "인류는 우리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천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2) “걱정, 불확실성, 기다림, 기대, 놀라움에 대한 두려움은 어떤 노력보다 환자에게 해를 끼친다. 그는 항상 적과 대면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3) "우리가 도달한 문명 상태에서는 지성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도덕적이지 않고 물리적인 불가능입니다."

4) "내 인생에서 고통 없이 뒤돌아볼 수 있는 부분은 없다."

5) “어떤 사람도, 심지어 의사도 '헌신적이고 순종적인' 간호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른 정의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이 정의는 돕는 포터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것은 심지어 말을 위해 할 수 있습니다.”

6) “가지고 있을 때 인생을 살아라. 인생은 훌륭한 선물입니다. 작은 것은 없습니다.”

7) "바닷가에 한가롭게 서 있는 것보다 열 번이나 파도에 묻혀서 새로운 세계로 가는 길로 준비를 예고합니다."

8) “두려움의 영 아래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은가.”

9) "나는 내 성공을 이것에 돌립니다. 나는 어떤 변명도 하지도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10)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은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11) "세상은 관습에 대한 자신의 독특한 재능의 발전을 때론 희생하나 모든 사람의 종말에는 후퇴도 합니다."

12) “자선을 베푸는 남녀들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으며 자신이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비지니스 문제에서 때로는 자신이 얼마나 잔인한 실수를 저지르는가.”

13) “여성 의사로 더 많이 합류하는 것을 보기보다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능한 한 적은 수의 의사를 만나고 싶습니다. 참고로, 여성들은 개선이 되지 않고 오로지 '사람'으로 노력했기에 저들은 삼류의 인생이 되는 데에만 성공했습니다."

14) “모든 것이 스케치입니다. 세상은 스케치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15) “나는 감정이 말로 낭비된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모두 결과를 가져오는 행동으로 정제되어야 합니다.”

16) “사람들은 효과가 마음에만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효과는 몸에도 있다. 우리가 형태, , 빛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실제 물리적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환자에게 제시되는 사물의 다양한 형태와 색상의 광채는 진정한 회복의 수단입니다.”

17) “불합리하게 아픈 사람들이 합리적인 고통의 원인으로 고통받는 것을 안다면 이 모든 일에 대해 더 많은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18) "병원에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환자에게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9)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실제적인 시작을 촉구할 기회를 결코 잃지 마십시오. 그러한 문제에서 겨자씨가 얼마나 자주 싹이 트고 뿌리를 내리는지 놀랍기 때문입니다.”

20) “인생무상 헛됨을 모른다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허영심을 가지는 것은 우리 삶에 대한 관심의 결핍입니다. 우리 삶에 대한 관심의 결핍을 채워줌으로써 우리만이 그것을 고칠 수 있습니다.”

간호 직업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에서 시작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적 운동 중 하나인 국제 적십자사는 병자와 고통받는 자를 돌보라는 성경적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 기독교인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이에 듀낭의 제안으로 186416개국 대표 협의회에서 결성된 적십자는 간호 개념의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어서 1893년 미국 하퍼 병원에서는 나이팅게일 서약문까지도 만들어졌습니다.

이곳의 간호 역사를 살펴볼 때에 이미 1600년대부터 위생의 개념이 있었다며 기록하고 있고, 1800년대 초중기에 위생법 등이 발효되었으나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며 전합니다. 그녀의 헌신적인 믿음에 의한 간호사역 덕분에 당시 영국군 부상자의 사망률은 40%대에서 2%로 감소하는 기적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나이팅게일이 영국군의 사망률을 눈에 띄게 감소시킨 점과 함께 또한 밤마다 성실하게 등을 켜고 병사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돌아다닌 점 등의 이미지가 합쳐져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언론에서 앞다투어 보도하며 기독 교안에서도 바른 믿음에 의한 '삶을 강조하며 주장'하는 경험적인 삶은 나이팅게일에게도 믿음이 동기가 되었기에 그 삶으로의 믿음직한 신앙의 헌신적 행동은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의 모범된 일면으로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오늘로 러시아 푸틴의 우크라니아 침공 전쟁은 예상외로 6개월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8년 전 2014년도에는 크림 반도 자체 공화국(UN의 당사자국 대표들끼리 싸인 후 우크라니아에 소속된 반도)을 조용히 침공하더니, 입으로는 형제국가라고 하는 우크라니아를 집어삼키려는 저 푸틴의 야심은 저들의 예상과는 크게 빗나가며 지금도 우크라니아 전력의 항전 의지가 강하기에 이 전쟁은 방향을 잃은 소모전으로 가고 있는 경향인 듯하다며 보도가 되고 있습니다. 이에 이 전쟁으로 인한 현재까지의 모습을 보면 양국 군인들의 사상자가 각각 8만여 명(16만 명)이며, 민간인은 12천여 명, 피난민은 일천만 여명에 육박하고 있고, 70여 년이 된 나토 회원국의 수는 증가하는 추세로 핀란드와 스웨덴이 가입이 되며, 발칸반도의 코소보 및 보스니아도 고려중인 것으로 밝혀집니다. 오늘은 특히 우크라니아의 독립일로 선포된 날인데도 지속되는 전쟁은 러시아의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하며 곧 에너지 전쟁으로까지 가게 되는 이때에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오늘 발표하기를 우크라니아에 가장 큰 규모의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한 무기들을 지원한다는 보도였습니다. 실로 두 나라 간의 전쟁은 무기들을 지원하는 서방 나라로 번져가고 있는 모습도 바라보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냉전의 시대로 이미 시작이 된 것을 즉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전력 요충지이며 흑해로 나올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인 크림 반도는 또다시 두 나라 간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에 우린 이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며 요한 계시록 33절 말씀과 함께 기도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멘!

 

"Remember therefore how thou hast received and heard, and hold fast, and repent. If therefore thou shalt not watch, I will come on thee as a thief, and thou shalt not know what hour I will come upon thee."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Revelation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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