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중얼거려도 믿음으로 굳세게 살라

 

Lamentations 3:39

Wherefore doth a living man complain, a man for the punishment of his sins?

살아 있는 사람은 자기 죄로 벌을 받나니 어찌 원망하랴?

Wherefore doth a living man murmur? 왜 살아있는 사람이 중얼중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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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ur murmuring is the devil's music. - Thomas Watson.

우리의 중얼거림은 악마의 음악이다. - 토마스 왓슨.

* Murmuring is a black garment, and it becomes none so ill as saints. - Thomas Brooks.

중얼거리는 것은 검은 옷이고, 그것은 성인만큼 아프지 않다. - 토마스 브룩스.

* Murmuring is a slippery way to an irrecoverable bottom. - Thomas Adams.

중얼거리는 것은 회복할 수 없는 바닥으로 가는 미끄러운 방법이다. - 토마스 아담스.

* The murmurer is his own martyr. - George Swinnock.

중얼거리는 사람은 그 자신의(곧 남이 알아주지 않는) 순교자이다. - 조지 스윈녹.

* Better to be mute than to murmur. - Thomas Watson.

중얼거리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낫다. - 토마스 왓슨.

* Complain to God you may, but to complain of God you must not. - John Flavel.

하나님에게 불평할 수는 있지만 그에 대해서 불평해서는 않된다. - 존 플래벨.

* The frog and the murmurer, both of them are bred of the mud. - Thomas Adams.

개구리와 중얼거리는 사람은 둘 다 진흙에서 자랐다. - 토마스 아담스.

* Complain without cause, and thou shalt have cause to complain. - Thomas Taylor.

이유 없이 불평하라, 그러면 불평할 이유가 있을 것이다. -토마스 테일러.

* Murmuring often ends in cursing. - Thomas Watson.

중얼거리는 것은 종종 욕으로 끝난다. - 토마스 왓슨.

God Save the King (now)...! 하나님 저 백성/왕을 구원하소서!

영국 여왕이었던 엘리자벳 2세의 서거하심으로 이곳의 분위기는 침울하나 또 다른 면에서는 이 일로 인해 새롭게 국왕으로 된 찰스 3세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국민들은 '죽음'은 인생길에 결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며 자신들을 성찰하는 기회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사역지인 SC에서 이른 아침에 만난 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중에 두 청년들은 호주에서 3주간의 계획으로 영국에 여행 차 왔는데 마침 이 기간이 기대치 않은 일로 중복되지만 순응하며 나름대로 자신을 숙고한다며 나눔의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Bankside/London Bridge에 위치한 S. Cathedral에 준비된 빈소의 자리에는 꽃들과 함께 어제의 2000여명의 여러 방문객들이 남긴 자신들의 싸인과 메시지와 함께 떠나신 여왕님의 업적을 생각하며 경외하는 시간들을 가지다. 체플린시의 모습은 여러 위로의 말씀들을 나누는 중에도 저들의 순응적 행위대로 자연스럽게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1:27) 말씀으로 귀한 증인역할을 할 수 있어서 주님께 다시 저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은혜에 감사한다.

옥스포드 대학교의 칸타버리홀에서 14세기에 강의하던 존 위클립은 그 말씀의 큰 빛을 향하여 초대 종교 개혁자의 길을 예시하며 미래를 예견한듯 했다. 또한 그의 앞에는 다가올 순탄치 않은 미래를 향하며 성경적 가르침은 따른 자들 그의 제자들을 롤라즈(Lollards)라 부르는데 이는 새롭게 진리를 발견한 저들의 시대적 부름 행동으로 이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때론 중얼거리며 한동아리를 이룬 모습들이다. 그런데 당시의 시대에 살던 저들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모습의 표현으로 '중얼거리다'를 의미하는 말의 표현은 중세 네덜란드 단어에서 이름을 따왔으며(아마도 경전 읽기에 기반한 그들의 예배 스타일을 반영). 하지만 그들은 일반적이지만 매우 제한된 소수 인원으로 당시에 알맞게 선별된 자들로 개혁 운동을 대표했던 것이다. 당시 함께 공부했던 제프리 초우서(영문학의 아버지격)는 정치일에 덤벼들며 생을 살아갔음에도 가르침을 받던 그는 교수였던 존 위클립 아래에서 배운 것에 큰 영향으로 순례자로의 순례길 여정에서 그 유명한 '칸타버리 테일'을 쓰게 된 것으로 아룁니다.

위클립 & 롤라즈 시대에서 200-300년이 지나며 불변하는 로고스/그 말씀의 경전은 결코 변함이 없었건만 영어의 표기법은 좀 달라진 듯싶다. 그럼에도 당시의 예나 청교도 당시나 사람은 죄성에 젖은 모습은 동일한 것이지요. 위 청교도들의 유명하던 표현 글들을 보듯이 청교도 당시에도 그 표기법은 중얼거림의 각 상황들과 시대적 분위기를 다 이해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해가 될 만큼 부정적인 표기법으로 대부분 쓰여진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를 또 다른 각도로 살피면 종교개혁 이전에는 개혁자들에 대해 표현하길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 저들을 철저한 이단자로 여겼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에 질문을 바르게 던져봅니다. 저들 개혁자들은 성경과 위배된 이단자였습니까? 물론 그 답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을 잘 이해하며 알맞게 우린 성경의 더 깊은 세계로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아무튼 작은 소리로 속삭이든 큰 목소리로 선포하든지 중요함은 마음 중심에서 울러 나오는 표현일텐데 이 역시 시대적 문화 습관에 따른 표현들 보다는 그 말씀에 따라 바르게 해석하며 그에 기대려는 노력으로의 바른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대에 들어서며 산업혁명의 성장 속에 탬즈강가의 새로운 개발 계획의 열매로 볼 때에 옛날의 티달 탬즈강에서의 자연스런 강변의 모습으로 자연과 조화있는 모습은 근대의 강변 경제 개발로 인해 강의 폭은 더욱 좁혀지며 그로인한 물의 유속이 빠른 그 물흐름을 봅니다. 유속에 따라서 바닷물이 육지의 물과 섞이며 밀물과 썰물의 교차는 더욱 7/5로 하루에 2번씩 바뀌며 심하기에 그래도 유유히 흐르는 물 흐름은 우리에게 세월의 흐름을 안내합니다. 이에 우린 그 말씀의 깊이를 더욱 잘 깨달아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살면서 언제나 진리의 편에 서기를 원합니다. 결코 혼합주의는 용납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리를 대함에 바른 자세에서 그 태도가 진리를 대하기에 잘 준비된 마음을 가지나 다시 강조하며 더불어 보면 진리이신 분 예수님/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에 바른 자세가 준비되었나 한번쯤은 자신들을 살피며 바른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미 우리 곁에서 떠나신 여왕 마마님의 혼/영은 이미 하늘나라로 떠나셨지만 그의 지상에서의 몸은 아직도 먼저 스코틀란드 성 자일스 대 예배당에 후에는 잉글란드 웨스트민스터 홀 & 수도원 및 윈저성의 성 조오지 교회당에 하관하시며 그곳에 모실 계획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흐르는 역사가 멈춘것과도 같이 한교회당에 그대로 머무르고 계십니다. 고 여왕 마마님은 스코틀란드 에버딘 근교의 에스테잇 발모럴 카슬에서 장거리를 차량 이동을 하게 되었고 필자가 글을 쓰고있는 이 시간은 마치 런던의 버킹험 궁전으로도 유사히 비교가 되는 스코틀란드의 수도 에딘버러의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으로 이동 하셨으며 후에는 가까운 성 자일스 대성당(장로교)으로 이동하며 그곳에서 여왕님을 회상하는 감사 예배를 드리고 또한 스코틀란드 국민들에게 기회를에게 애도의 기회를 드리기 위해 24시간동안 여왕님의 운구는 그 역사와 함께 교회에서 쉬시고 계십니다.

영국 로얄마일 거리 중심지에 있는 성 자일스 대성당, 여기에 엘리자벳 2세 여왕의 시신이 안치됐다.
영국 로얄마일 거리 중심지에 있는 성 자일스 대성당, 여기에 엘리자벳 2세 여왕의 시신이 안치됐다.
성 자일즈 성당에 운구되는 메리 여왕
성 자일즈 성당에 운구되는 메리 여왕

필상에서 "죽은 자는 말하지 않지만 역사는 대신하여 전하고 있다."는 표현처럼 성 자일즈 대성당(스코틀란드 장로교회) 주임 목사님은 참여자들에게 환영을 하셨다. 그곳은 마땅히 우리가 교회사에서도 잘 알려진 곳으로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로만 카톨릭 교회가 집권하고 있었다가 스코. 종교 개혁과 함께 당시 존 녹스 목사님은 스코. 여왕 메리(블러디 메리)를 대항하며 그 성경 말씀으로 강렬하게 저항했던 곳이며, 청교도 철의 장수이며 주장하던 공화당의 리이더였던 올리버 크롬웰이 설교를 했던 곳입니다. 이처럼 참으로 많은 역사가 숨겨진 그곳에는 개신교 개혁 신앙의 흔적을 찾아 보고픈 스코. 역사/교회사의 흔적이 짙게 남은 곳이다. 곧 본인이 태어나기 400년전인 1559년도 존 녹스 목사의 사역지로 부터 오늘 날에 이른 엘리자베스 2세 여왕까지의 개신교 신앙 그 신학의 변천 과정도 살펴봄즉하다. 특이한 모습은 오래전 여왕마마께서 즉위하실 때에 헌상이 되셨던 왕관 곧 스콧. 여왕의 왕관이 24시간 그곳의 여왕님의 운구위에 놓여졌고 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마일 2킬로의 줄을 잇고 조문하기 위해서 서서히 움직이는 모습이다.

여기에 성 자일스 교회의 이름인 세인트 자일스의 역사를 안내한다. 이는 1124 AD David I세 왕이 St Giles' 설립하며 davidiDauíd mac Mail Choluim (King David I)로 그해에 St Giles'를 설립했는데, 이 기간 동안 로마와 스코틀랜드 교회 사이의 유대가 더욱 가까워졌었던 시기였다.특이하게도 에딘버러 구시가지보다도 더 먼저 세워진 교회당이다. 데이비드 1세가 나중에 (지금의 홀리루드 궁전 하우스를 설립하며 홀리루드 수도원을 설립했을 때 그는 수도원장에게 세인트 자일스를 향한 능선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고, 캐논게이트 버크를 설립하고 현재 그 유명한 로열 마일로 알려진 곳을 형성했다.) 이처럼 시대의 흐름에 달리 표기되며 전혀 예상치 않던 또 다른 해석이 빈번한 모습으로 우리의 언어 구사는 다양하며 화려함을 낳게 되기도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1558년도에는 아이러니칼하게도 성 자일스 날을 반대하며 일어난 한 폭동으로 말미암아 개신교가 스코틀랜드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어느 날 밤 성 자일스의 동상은 여전히 ​​가톨릭 신자가 다니던 교회에서 도난당했다. 한때 그곳 에딘버러 시가지의 중심거리인 프린스 거리의 가든을 가득 채웠던 썩은 수역인 에딘버러의 노르 로크에 던져졌으며, 결국 전통적인 성 자일스의 날 퍼레이드는 우상 숭배를 하게 된다는 '성도의 이미지'를 부수려는 개신교도들에 의해 그때부터 중단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개신교는 흘러내리는 물을 타듯하는 역사로 이루어져 탁월한 개혁자이며 기도의 대가였던 존 녹스 목사가 다음해인 1559년도에 이 교회에 임직을 시작함으로 새로운 봄을 맞이하듯 교회사는 개신교사로 바뀌고지고 만다. 이에 이미 존 녹스 목사/John Knox1540년대에 RC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은신처와 망명지로 도피한 스코틀랜드의 사제였었는데, 스위칠란드 제네바에서 그는 프랑스 개혁가인 칼빈 목사/John Calvin과 친구가 될수있는 기회도 되었다. 스코틀랜드 본국으로 큰 뜻을 가지며 돌아온 그는 당시 정치적 상황도 잘 파악하며 추종자들의 군대를 세인트 자일스로 진군하여 그곳에서 처음으로 설교했었다. 이어서 그는 곧 바로 이어진 다음 주일에 그는 목사로 선출되며 임직되었으며 따라서 교회당 건물은 RC/카톨릭의 여러 장식들을 벗겨버리고 이듬해인 1560년도에는 스코틀랜드에 장로교를 처음으로 설립하였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의회는 1560년에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전적으로 폐지하고 스코틀랜드를 이제 개신교 국가로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에는 여전히 가톨릭 여왕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담대하게 일어났던 일이지요. 그러므로 가톨릭 교회로서의 세인트 자일스의 지나간 400년은 공식적으로 끝이 나버린 셈이다. 저들은 당시에 청교도의 영향을 받아서 건물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을 모두 제거하고 오래된 교회의 은을 녹여서 판매하여 개신교식 편리하며 단순히 재장식을 위한 기금을 마련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스콧. 땅에 명예로운 장로교가 탄생하게 된 셈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그분의 섭리하심 안에서 열심히 뛰며 인도함을 받는 인도자의 몫으로 하나님의 역사는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1560)의 주요 지도력을 발휘한 강력한 설교자였던 John Knox는 그때부터 12년후인 1572년에 사망할 때까지 St Giles의 충직한 목회자였다. 따라서 그는 교회 마당에 묻혔으나, 이후에 불행하게도 의회 광장으로 곧 주차장안으로 포장 되었다. 1800년대 곧 19세기 동안에는 녹스에 대한 추모비를 제공하기 위한 다양한 공공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묘사하는 철저한 장로교식 모든 것이 이미지에 대한 열렬한 반대자에게는 진심으로 싫어할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합의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1902년 대성당 관리 위원회는 마침내 올버니 통로의 북서쪽 벽에 그의 동상을 세우는 계획을 승인했으며 이 디자인은 유명한 스코틀랜드 조각가인 Pittendrigh MacGillivray R.S.A.가 제출했으며 비용은 그 당시의 돈인 £1400이었고 이로서 당시에 국제적인 위상을 가진 J.K./존 녹스는 전 세계 기독교인이 추앙하며 바라보는 대표적 개혁자로 알려지게 되다.

 

필자는 또 강조하고 싶다. '역사는 중얼거릴지라도 목표를 향하며 긍정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역사이다'라며... 또한 우린 더욱이 그리스도 없이는 불완전한 모습들이기에 한 중얼거림의 순례 역사이기도 한 것이다. 이는 그분의 섭리하심이 없다면 우리에게는 올곧은 진리를 찾아 발견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 진리를 믿고 행하는 모습에 목격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탬즈 강물의 흐르는 소리가 어느 누구에게는 중얼거리는 소리로도 들릴 수가 있지 않겠나? 그러나 그 물의 흐름처럼 역사는 지나치고 마는 것만은 아니다. 스콧 여왕이었던 메리가 그 진리 신봉자로 독실하던 300여명의 개신교도들 지도자들을 당시 RC종교의 이름으로 처형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또 다른 면으로 주 예수님의 나라를 더 빨리 다가오게 했을 줄을 그 누가 짐작을 할 수가 있으리요마는 필자에게 있어서 침묵도 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때로는 중얼 중얼거리며 역사와 함께 흐르련다. 이를 세상 사람들은 비아냥해도 좋다 그래도 역사의 시간 공간은 유유히 흘러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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