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80)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92)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케톰 레바보)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우비트부노트 카파이오)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야네헴)”(78:72).

우리는 이제 팬데믹 오미크론 바이러스가 함께 살아가는 인생이 되었다. 호모 바이러스(Homo Virus) 인류시대가 도래하였고, 우리는 이제 이 팬데믹 시대에 언제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살아가고 있다. 마치 출애굽기의 열 가지 재앙이 일어났던 것 처럼 오늘의 현실이 바로 10번째 장자 죽음이 도래할 시점에 아닌가 하는 생각한다. “그의 맹렬한 노여움(하론 아포)과 진노(에브라)와 분노(와자암)와 고난(웨짜라) 곧 재앙의 천사(말아케 라임)들을 그들에게 내려보내셨으며”(78:49). “애굽에서 모든 장자(콜 베코르)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레쉬트 오님)을 치셨으나 그가 자기 백성은 양 같이(카쫀)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카에데르) 지도하셨도다(와여나하겜)”(78:51-52).

시편 78편은 신뢰와 명상의 시편이다, 또한, 구속사 시편으로 지혜 시편들(36, 37, 49, 73, 112, 127, 128, 133)에 속한다. 이 지혜 시편 중에 앞서서 다루었던 토라시편(1, 19, 119), 아크로스틱(알파벳) 시로서 시편 37, 112; 119; 9-10, 25, 34, 111, 145) 시편들은 암송하며 제의적인 예배에 사용되었다. 이 시편들을 중심으로 시편 150편의 세계가 구성되었을 것이다. 삶의 수수께끼와 인생의 문제를 지혜 시편(37, 49, 73)을 경건한 삶의 고난을 시로 풀어서 결국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이 건강하고 온전함과 복지에 거하게 되고, 계약 공동체 내에서 자유와 하나님 섬김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만나를 비같이 내려 먹이시며 하늘 양식을 그들에게 주셨나니”(78:24),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38), 시편 78, 구속사 시편은 지혜시로 시작하며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교육하기에 중요함을 말한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마샬)로 말하며 예로부터(미니 케뎀) 감추어졌던 것(히도트)을 드러내려 하니(에프테하)”(78:2). 반드시 알아야 하는 구원의 이야기라 조상들과 부모를 통해 구전으로 듣고 배우며 시로 암송하였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들어서(샤마에누) 아는 바(와네다엠)요 우리의 조상들이(와아보테누) 우리에게 전한 바라(시페루 라누)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로 네카헤드 미베네헴)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아쉐르 아사) 기이한 사적(웨니프레오타이오)을 후대에(레도르 아하론) 전하리로다(메사프림)”(78:3-4). 구약의 거대한 구원의 역사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게 하고 예배의 시간에 암송하며 고백하고 구원의 찬양을 하는 모습이 시편 78편 속에 나타난다. 오늘 이러한 구원의 노래를 다시 우리는 팬데믹 시대에 하고 있다. 이러한 신앙의 모범을 과거 미개한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선교하러 오신 선교사들도 감사와 찬양을 불렀던 것이다.

해주 지역에 복음화를 이루었던 데밍(C. S. Deming, 도이명)은 미남감리회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로 해주에서 선교사역을 했다. 그는 뉴욕대와 드루 신학교를 졸업하고 1905913일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는 해주에서 감리교 협성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15년 동안 교수 생활을 하면서 피어선 성경학교장,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역임하였다. 1927년부터는 조선예수교서회 총무를 역임하며 문서 선교를 하였으며 1929년 이후에는 만주 주재 선교사로 활동하며 한국 선교의 북방 지역을 전도하는 선교 비전을 가졌다. 그는 해주 지방회에 감리사로 부임하여 1937년 병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별세했다. 그는 해주 지방회에 감리사로 있을 때 츄(N. D. Chew)와 그로브 선교사와 더불어 동서 구역을 맡으며 같이 순회 전도를 하였다.

1905년 내리교회에서 열린 연회 당시,가운데 케이블선교사 – 북감리교회 기이부(E.M. Cable) 선교사- 김기범목사 - 남감리교회 도이명(C.S. Deming)선교사 순
1905년 내리교회에서 열린 연회 당시,가운데 케이블선교사 – 북감리교회 기이부(E.M. Cable) 선교사- 김기범목사 - 남감리교회 도이명(C.S. Deming)선교사 순

1910년 설립된 해주 구세병원을 중심으로 미감리회가 선교후원을 하였고, 이 병원은 노튼 선교사가 설립하여서 노튼 기념 병원이라고 불리었다. 이 병원을 중심으로 노튼과 츄 선교사가 같이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진료 활동과 전도 활동을 벌이게 된다. 데밍은 베일러(Miss M. Beiler)와 더불어 선교를 하며 191164년간 교육했던 6명의 경신학당 졸업생 중에 정재용 형제를 전도사로 세워서 주일학교 책임자로 사역하게 했다. 정재용은 투철한 신앙심과 강한 교육의 열정으로 의창(懿昌) 학교의 교감으로 부임한다. 김창준 목사에게 전달받은 문서를 가지고 서울역으로 갔다가 정춘수 목사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문서를 가지고 독립운동 발화지로 간 것이다. 거기서 그는 33인의 민족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자 탑골 공원에서 가져간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면서 3.1운동의 발화를 시작하게 된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역사에 데밍과 같은 선교사의 독립의지와 자유의 복음 전도와 그 뜻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늘 우리도 복음의 자유와 해방을 땅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자.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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