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첫 번째 일
인간이 이 세상에 마치는 날에 한 가지를 한다면 그것은 무슨 일일까? 사실 매일 삶은 이것이 시작되고 마침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삶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 해답은 인류가 범죄 한 이후 창세기 3장의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첫 번째 나오는 성경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를 답하면 된다. 그것은 창세기 4장의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다. 아벨의 기사는 아주 간단하게 기록했다. 아벨은 제사를 드맀는데, 형 가인 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 그런데 그 제사로 인하여 형 가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아벨의 삶은 오직 하나 한 번의 예배를 잘 드린 것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했다.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 억울한 일이다.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 한번 드린 일 외에 다른 언급이 없다. 그런데 성경은 아벨에 대한 평가는 높았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제일 먼저 아벨이 드린 예배를 소개하고 있다. 한 번의 예배로 놀라운 축복을 받았다. 비록 그가 죽었지만 지금도 그가 드린 믿음의 예배는 지금 예배를 드리는 우리에게 예배의 본질을 알려 주고 있다. 어떤 삶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인가? 어떤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은 선한 일로 시작하셨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죄로 시작했다. 다시 하나님은 인간에게 가죽옷을 지어 주면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 은혜를 알고 하나님께 믿음의 제사를 드린 아벨을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그리고 믿음의 장에서 제일 먼저 믿음의 사람으로 제시했다.
짧게 그려진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오늘날에 예배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아벨의 제사에서 성경은 그가 어떤 방법으로, 어디서. 언제 제사를 드렸는가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다만 자기에게 있는 예물을 믿음으로 드린 것 밖에 없다. 믿음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중심으로 드리는 제사를 보시고 아벨의 제사가 합당하다고 인정하셨다.
내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 마음에 합하는가가 중요하다. 결국 예배는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이 예배의 제일 된 원칙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려면 인간적인 술수와 방법을 따르지 말고 하나님이 제시한 명령과 규례대로 순종하면 된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하여 제물과 다른 의식을 제시한 것은 이런 제사법 등을 실천하면서 자기를 죽이는데 목적이 있다.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인가? 인간의 방식인가? 를 살펴보아야 한다. 결국 예배는 나를 말씀 앞에서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그것이 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면 세상에서 가장 멋있는 살을 사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죽이는 것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자세다. 이것을 늘 예배할 때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형식과 방법도 보지만 마음을 더 보신다. 형식과 방법도 마음의 표현이기에 결국은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 예배는 여기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은 순수함이요 거룩함이다. 예배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목적을 두면 그것은 거룩함이 상실된 것이다. 그것은 예배자체를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이것이 정리가 안 되면 그 다음 예배 방법은 큰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방법은 언제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향이 잘못되면 그 이후에 방법은 큰 의미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중심을 보신다는 뜻이다.
오직 하나님 한분을 높이는 것 이외에 다른 목적이 있으면 그것은 가인의 예배가 된다. 예배는 오늘 나의 신앙을 점검하는 바로미터다. 예배하는 것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으로 예배하느냐이다. 우리 모두 예배 중에 정신 차려 조심해야 할 점은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에서 나로 바뀌는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 자체가 아닌 수단으로서 프로그램과 전도행사가 되거나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속에 이것을 과감히 제거하는 일이 필요하다. 예배를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집회가 되는 것은 위험하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 죄를 쌓는 악한 행위가 된다.
신앙이 도구화 된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 예배
우리는 신앙을 도구화 하려고 한다. 구원과 영생조차도 하나님 보다 우선될 수 없다. 영생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참 신앙이 아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예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이 위험하다.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외친다고 하나님이 임재하는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바알숭배나 아데미 신전 예배는 신의 이름을 수백 번 하나된 목소리로 반복하여 부른다. 그러다 보면 거기에 신비로운 힘을 느낀다. 웅장한 건물과 신비롭게 치장한 성당에서, 또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거기서 느끼는 감동과 은혜가 크게 느껴진다. 많은 사람들은 이 함정에 거의 빠진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초점이 있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세상의 것들로 느끼게 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들 수 있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작은 지하실 교회에서 느끼는 것과 수천 명 모이는 큰 장소에서 느끼는 시설과 사람들의 수에 따라 달라진다면 내가 믿는 그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이 아닐 수 있다. 하나님 보다 위대한 것은 없다. 누구도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이 가장 큰 증거다.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적인 하나님을 우리는 세상의 크기와 결과를 도구로 하나님의 능력을 느끼거나 증명하려고 시도한다. 과학적으로 유명인이, 최고 재벌이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이 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잘못된 믿음이 될 수 있다. 예배도 이처럼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을 만들고 연출하여 기획해 보려고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동과 은혜를 받으려고 감성과 보이는 것에 너무 집중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과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최고의 예배는 하나님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하박국 2:20)
예배를 드리는 4가지 유형
공간 중심의 예배
공간을 중요시 하는 예배는 이방종교의 특징이다. 그들은 장소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신전을 크게 세운다. 로마 시대에서는 건물이 중요하다. 마치 파르테논 신전과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이 얼마나 크고 웅장한가에 관심이 있다. 공간중심의 예배는 모임과 건물을 중시한다. 교회가 예배를 변질되는 가시적인 신호는 교회가 공간을 중심하는 모습이다. 교회건물과 환경과 예배당이 크기와 모양과 숫자 등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공간중심의 예배에 속한 경우다.
사람 중심의 예배
예배의 중심이 사람에게 있는 경우다. 사람의 마음과 평안을 위해 예배가 진행된다. 그러다 보니 예배의 방식도 인간의 즐거움과 편의를 위해 구성된다. 메시지 내용도 인간에게 듣기 좋은 말씀으로 가득차고 모든 것을 사람을 위한 도구로 삼는 예배 유형이다. 심지어 하나님 말씀도 인간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고 그런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만들어 간다. 실용주의 예배가 이런 방식을 취한다.
시간 중심의 예배
예배 시간과 정한 날짜나 절기를 중심하는 예배유형이다. 영적 깊이가 있고 예배의 본질을 추구하는 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예배시간을 고수하거나 하다 보면 역시 예배가 시간에 갇힐 수 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사람보다 더 중요시하면서 시간을 너무 강조하는 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유대인들이 시간에 머문 것은 아직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믿음 중심의 예배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관점으로 예배를 이해하는 유형이다.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예배하며 예배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 마음으로 오직 주님만을 믿고 온전히 자기를 죽이며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내는데 초점을 두는 예배다. 영과 진리와 드리는 예배다.
아벨의 예배와 수가성 여인이 드린 예배가 여기에 해당된다. 그리고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상의 예배의 모습이다. 예수님 자신이 성전 되고 또 역사와 시간의 중심이 되는 그리스도중심의 예배를 의미한다. 나는 어떤 예배를 매주일과 매일 드리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