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를 혼인관계와 부부관계로 설명한다. 이는 구약 선지서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부부관계, 혼인관계에 있어서 절대필요조건은 혼인서약을 준수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간의 믿음의 조건이며 토대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순결과 정조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부부관계가 성립, 유지되는 것이다. 

솔로몬 이후 통일 이스라엘은 북조 이스라엘 10지파와 남조 유다 두 지파로 나뉜다. 남조 유다는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중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으나, 북조 이스라엘은 사마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여호와를 떠나 금송아지 바알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 이유는 백성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선지자 호세아 사역 시기는 북조 이스라엘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부강했다(1절). 그에게 하나님은 놀랍게도 음란한 여인 고멜을 데려다가 아내를 삼고 가정을 꾸리라고 지시하셨고 호세아는 힘들었겠지만 순종하여 세 자녀를 가진 가정을 이루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명령을 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음란에 빠져 타락했기 때문(2절) 라고 밝히셨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숭배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1. 배교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요청(2~4절)

호세아의 자녀의 이름이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저주의 이름인 장남 이스르엘(흩어버리다),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는 딸 로루하마, 백성이 아니라는 차남 로암미, 모두 하나님을 떠나 배교한 백성을 상징하는 이름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한번 따져 보자고 요청하셨다.   
* 호 2:2~4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 그가 그의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그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그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내가 그의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하나님께서 논쟁하라! 네 어미를 '정죄하라(rebuke)'고 두 번씩이나 요구하셨다. 이스라엘은  호세아의 아내 고멜이 전에 사랑했던 자에 이끌려 같이 가출을 한 것 같이 이스라엘은 이방 문화를 동경하며 그들의 신을 섬기며 방탕한 생활로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 결과 고멜과 같이 음란한 자식들을 양산했다. 하나님은 이 상황을 호세아 가정 속에서 실제로 보여주셨다. 사실 호세아는 자녀들을 두었지만, 실상은 그 자녀들이 누구의 씨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내가 방탕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음행 상황이고 과정이고 그 결과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희 어머니와 논쟁하고 논쟁하라!” 라고 다그치셨다. 
여기서 “어머니(어미)”는 이스라엘 민족인 야곱의 12 지파를 뜻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방에서 불러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과 혼인관계를 맺으시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다. 이는 통일 이스라엘이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에 화려했음을 의미한다. 
문제는 그 이후 역사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 주변 나라와 동맹을 맺고 정략결혼을 통하여 국가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그 나라의 우상을 예루살렘 성안과 성전 안에 허용하기까지 했다. 결과, 온 나라 백성이 우상 숭배를 하며 음란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 큰 아이러니는 이 모든 과정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으로 배교적인 방탕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모든 것으로 자기들의 쾌락과 향락을 즐겼다. 하나님은 그 점을 지적하셨다. 
* 호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에스겔도 이 점을 지적하며 이스라엘이 멸망당한 이유를 질책했다. 
* 겔 16:9~20 내가 물로 네 피를 씻어 없애고 네게 기름을 바르고 수놓은 옷을 입히고 물돼지 가죽신을 신기고 가는 베로 두르고 모시로 덧입히고 패물을 채우고 팔 고리를 손목에 끼우고 목걸이를 목에 걸고 코 고리를 코에 달고 귀고리를 귀에 달고 화려한 왕관을 머리에 씌웠나니 이와 같이 네가 금, 은으로 장식하고 가는 베와 모시와 수놓은 것을 입으며 또 고운 밀가루와 꿀과 기름을 먹음으로 극히 곱고 형통하여 왕후의 지위에 올랐느니라.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 네가 네 의복을 가지고 너를 위하여 각색으로 산당을 꾸미고 거기에서 행음하였나니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니라. 네가 또 내가 준 금, 은 장식품으로 너를 위하여 남자 우상을 만들어 행음하며 또 네 수놓은 옷을 그 우상에게 입히고 나의 기름과 향을 그 앞에 베풀며 또 내가 네게 주어 먹게 한 내 음식물 곧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꿀을 네가 그 앞에 베풀어 향기를 삼았나니 과연 그렇게 하였느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또 네가 나를 위하여 낳은 네 자녀를 그들에게 데리고 가서 드려 제물로 삼아 불살랐느니라.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겨서 나의 자녀들을 죽여 우상에게 넘겨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였느냐,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네가 모든 가증한 일과 음란을 행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그동안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고맙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받은 그것으로 허랑방탕하여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다 허비했다. 그들의 음란 행위는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하나님은 이를 적나라하게 밝히셨다. 음탕한 얼굴, 질퍽한 성적 쾌락, 결과 낳은 음란한 자식 등 참으로 수치스러운 타락 현장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내가 음란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무엇이 아내가 남편을 떠나도록 했는가? 5절을 보면,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무슨 말인가? 세상적인 물질과 쾌락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아내가 남편을 떠나고 가정을 떠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세상적인 애정공세와 물질적 유혹이다. 물질적 풍요와 쾌락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이 좋아서 남편을 떠나고 가정을 떠난 것이다. 지금도 성과 도박과 같은 유혹은 도덕 상실로 이어져 가정을 붕괴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그 죄의 현장을 숨김없이 보시고 알고 계셨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논쟁하자고 요구하셨다. 

우리가 이 말씀에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지난 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와 배신과 배교의 역사를 숨김없이 점검하고 확인하고 회개할 것을 원하시는 하나님은 강력하게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같은 요구를 하신다. 이것이 설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성도들이 듣고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 설교다. 문제는 오늘날 이런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는 데 있다. 현대 교인들은 그저 듣기 좋고 재미있는 성교를 원한다. 목사들은 이에 편승하여 인기를 얻기 위하여 마땅히 전해야 할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를  전하려 하지 않는다. 이는 분명 직무 유기이며 타락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런 목회자, 설교자 아니 한국교회의 상황을 그냥 버려주기만 하지 않으실 것이다. 반드시 따져 보자고, 논쟁해 보자고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징계를 하실 것이다. 현재 한국 교회와 교계는 어떠한가? 심히 우려스러운 상황이 아닌가?

다음 구절을 보자.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명령하셨다. 
* 계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개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자신의 지난날의 행위를 점검하고, 확인하여 무엇이 문제였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참된 회개다. 그리고 다시는 그 짓을 하지 않는 것이 회개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탕자가 그렇게 회개했다. 
* 눅 15:17~20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촉구하시며 즉각 돌아올 것을 강하게 요청하셨다.  


2. 하나님의 간섭과 적극적인 구애

한편,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은혜를 저버리고 방탕에 빠진 아내 이스라엘을 그냥 방관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책망하실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이 가려는 길을 방해하고 막으셨다.  
* 호 2:6~13 그러므로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그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그가 그 사랑하는 자를 따라갈지라도 미치지 못하며 그들을 찾을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 그제야 그가 이르기를 내가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니 그 때의 내 형편이 지금보다 나았음이라 하리라.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내 곡식을 그것이 익을 계절에 도로 찾으며 내가 내 새 포도주를 그것이 맛 들 시기에 도로 찾으며 또 그들의 벌거벗은 몸을 가릴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사랑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그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그가 전에 이르기를 이것은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내게 준 값이라 하던 그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거칠게 하여 수풀이 되게 하며 들짐승들에게 먹게 하리라. 그가 귀고리와 패물로 장식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따라가서 나를 잊어버리고 향을 살라 바알들을 섬긴 시일대로 내가 그에게 벌을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방탕의 길로 가려는 것을 막고,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고, 사랑하는 자를 따라 가도 만나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녀를 유혹했던 매력적인 물질과 그 화려함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 지를 깨닫게 하셔서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사모하고 자랑할 것이 없게 하셨다. 그들이 음란에 완전히 빠지지 않게 개입하시고 방해하셨다. 그리고 음란과 방탕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여지없이 밝히셔서 철저하게 심판하셨다. 그들이 세상 적으로 즐기던 화려함과 웅장함과 부귀와 영화를 하루아침에 망하게 하신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그들을 참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해서 하나님은 그들이 향락에 빠져 살던 것을 심판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았던 지난날의 연수대로 하나님은 심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애증어린 사랑이다.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시며 우리 일상에 개입하셔서 구원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순간순간 우리를 일깨우시고 간섭하시고 이끌어 보호하시며 순결하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욥은 바로 그런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았다. 
* 욥 7:17~19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지난날을 되돌아보기 바란다. 여기까지 온 인생 여정을 점검하길 바란다. 그 과정 속에서 심한 낙심과 좌절을 수도 없이 맛보았을 것이다. 현재의 삶 역시 한심스럽고 저주스러운 가운데 깊은 좌절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 않은가! 이 말씀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시라. 이제까지의 인생의 여정은 바로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이며, 구애이며, 간섭하신 것이라는 것과 마음과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인생 여정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막으심이요 간섭이라는 점을 깊이 인식하기 바란다. 


3. 하나님의 구체적인 구애

하나님은 용서하기 힘든 음란한 이스라엘에게 다시 구애하신다. 몇 가지 구애 내용을 보자. 
* 호 2:14~17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급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첫째, 설득하시며 위로하신다(14절). 
‘거친 들’이란 누구도 잘 가지 않는 고독하고 조용한 것을 뜻한다. 그런데 오히려 그곳은 하나님과 긴밀한 대화가 가능한 곳이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회개와 치유 그리고 다시 살 용기를 얻게 하고, 위로와 재생의 기회를 얻는 장소다. 우리에게 얼마나 하나님의 위로와 치유 그리고 회복이 필요한가? 삶이 힘든가? 하나님의 설득과 위로를 기대하시라!

둘째, 삶의 터전을 마련하시고 소망을 갖게 하신다(15a절). 
‘포도원을 주시겠다.“ 는 것은 삶의 터전, 육신이 살아가는 공급원을 제공해 주신다는 뜻이다. 회개하며 아버지께 돌아온 탕자에게 아버지가 한 것과 같이 (눅 15:22~32), 영육 간에 풍성함을 보장하신다. 그리고 아골골짜기를 소망이 되게 하신다. 이는 여리고성 정복 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도적질한 아간과 그 일가족 모두를 죽여 시체를 버렸던 저주의 아골 골짜기 같은 절망의 상황에서 벗어나 소망을 갖게 하실 것을 보장하시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죄 가운데 죽음의 절망 속에서 살던 우리를 예수 안에서 영생을 바라고고 살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이를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 엡 2:1~6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를 십 수 년을 믿는다고 하면서 과거의 영화와 풍성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고 그 화려함과 풍부함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있다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이제 벗어나야 한다. 현실을 인정하고 솔직하게 하나임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 나오시라. 그리고 예수 안에서 주어진 영광스럽고 고상한 신분을 확인하시라. 성도가 예수 안에서 누리는 순결과 거룩함과 영광됨을 인식하고 겸손히 신랑 되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길 바란다.   

셋째, 구원의 역사를 이루신다(15 하반절). 
이것이 구원이다. 이제 하나님은 그 소망을 가지는 그들의 조상이 출애굽 때 홍해를 건너는 기적적인 구원을 경험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진정으로 예수 믿어 거듭나는 인생인 것이다. 

넷째, 진정한 남편이심을 깨닫게 하신다(16절). 
하나님께서 음란하여 남편을 버리고 가정을 버리고 방탕한 삶을 살았던 아내를 다시 불러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남편이 다시 되겠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도 되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고 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남편을 떠나고 가정을 떠난 여인을 다시 들이는 남편 하나님이시다. 
* 호 2:16~17 그날에 네가 나를 남편(이쉬, ishi)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  

여기서 ‘바알(Baal)'은 고유명사로 바알 신의 이름이지만, 보통명사로는 ‘주인(the lord), 혹은 남편(husband)’이다. 이 구절은 말의 유희(word play)이다. 바알을 주인(Baal is the lord)으로 삼고 섬기던 배교의 삶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남편 즉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닌 진정한 남편과 아내의 부부관계가 되어 하나님을 남편(이쉬 ishi)이라 부르게 하겠다고 하신 것이다. 진정한 부부는 나이와 신분을 초월한 관계로 맺어 져야 이루어진다.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동등한 관계가 설정되어야만 진정한 부부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형편없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부르셔서 자신을 남편으로 부르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여자를 부리는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여자에 대한 법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권리를 가진 남편’이 되시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고한 사랑이고 끈질긴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 사랑의 은총을 입은 존재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고 무한한 은혜를 베푸셨으며 구원하신 것이다.  

 

결론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유대인 남성이 랍비를 찾아왔다. 
남성: “제 아내가 간음을 했습니다. 이혼하고 싶습니다.” 
랍비: 단호하게 “안 돼!”. 
남성: “그럼, 그런 여자와 계속 참고 살라는 말입니까?” 
랍비: “그걸 왜 이혼을 하니? 죽여 버려야지.”(레 21:7~9)

아내의 불륜은 이렇게 유대법상 이혼 사유가 아니라, ‘처형 사유’다. 그런데도 사랑의 하나님은 자신이 제시한 율법조항을 적용하지 않으신다. 그리고 불륜을 저지른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그녀를 맞아드려 남편이 되어 주겠다고 하신다. 놀라운 은혜요 끈질기고 지독한 사랑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다. 죄를 짓고 타락하여 세상 가운데 반역의 삶을 살아간다 하더라도 극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까지 죽이셔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결코 택한 백성을 포기할 수가 없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떤 조건 하에서도 끝까지 사랑하신다. 이는 우리를 미치도록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미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신부요 아내이다. 이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을 아시는가? 믿으시는가? 이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눈이 멀어 무조건 사랑하신다. 우리에게 미치셔서 ‘미친 사랑’을 하신 것이다. 아골 골짜기와 같이 저주와 사망 가운데 빠져 사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죄를 당신의 외아들에게 담당시켜 십자가에서 처형하여 우리가 받은 죄의 값을 다 치루셨다. 그리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시고 영원한 영생을 허락하셨다. 
* 요 3:17~21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다. 이 부부관계를 추악하게 하지 말고 거룩하고 고결한 하나님이 집,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가꾸어 가야 한다. 모두 남편이신 주께서 사랑해 주신 바를 깊이 인식하고 고백하며 사모하여 순결하고 순수하여 신랑 되신 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름다운 신부가 되길 바란다.  

 

<기도>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놀라운 은혜로 저희를 부르시고 변화시켜 영광스러운 주의 신부로 삼아주심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받았사오니 신분에 걸맞은 생각과 의식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순결하고 고결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준 있는 성숙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빛과 소금인 영광스러운 신분을 잘 견지하며 세상을 섬기는 주의 신부가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주 예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박병은 목사
박병은 목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