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사 41:10)

예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어디로 이끌든지 아브라함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나서야 한다. 추수할 일꾼으로 전도의 사명자로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순종하며 주님을 따라나서지 아니하는 것은 그 속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 물질에 대한 걱정 등... 이런 모든 것들이 순종하며 따르는 길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성경은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쫓는 믿음의 길은 잠시 잠깐 쫓다가 뒤돌아서는 길이 아니요, 영원히 주와 함께 걷는 길이 되어야 한다. 어두운 그늘 에워싸고 환난과 시험과 죽음이 닥쳐와도 주님 지고 가신 골고다 그 언덕길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남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앞에서는 그날까지 믿음으로 따라가야 한다.

 

작사: 제시 파운즈(J.B. Pounds;1861~1921)
작사: 제시 파운즈(J.B. Pounds;1861~1921)

작사:

제시 파운즈(J.B. Pounds;1861~1921)

이사야 41:10절 말씀을 바탕으로 오하이오주 히람(Hiram) 출생으로 15살 때부터 신문에 논설을 썼으며, 신앙잡지에도 글을 발표할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난 제시 파운즈(J.B. Pounds;1861-1921) 여사가 1887년 작곡자 타우너의 부탁을 받고 작사하였다. 그녀는 1896년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중앙교회 존 파운즈(John Pounds)목사와 결혼하였다. J.파운즈 목사님의 사모로 살아생전 400여 편의 찬송 시와 50여 편의 가극, 칸타타 등을 만들었다.

이 찬송은 제시 브라운양이 결혼하기 9년 전인 1887년에사랑하는 주님 앞에작곡자 타우너(Daniel B. Towner)가 가사 없이 작곡한 곡조에 맞춰 1~2절을 작사하여, 타우너가 출판한 복음찬송가-구 찬송가'Hymns Old and New, 1887'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후에 헬렌 알렉산더(Helen C. Alexander)1915년경에 3~4절을 추가하였는데, 우리 찬송에는 3절이 빠지고 4절만 올려져있다.

 

작곡: 다니엘 브링크 타우너(D.B.Tower;1850~1919)
작곡: 다니엘 브링크 타우너(D.B.Tower;1850~1919)

작곡:

다니엘 브링크 타우너

(D.B.Tower;1850~1919)

미국의 위대한 찬송 작곡자인 다니엘 브링크 타우너(D.B.Tower;1850-1919)1887년 만들었다. 타우너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타우너힐(Towner Hill) 출생으로 그의 아버지가 음악 교사였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음악을 배웠다. 목소리가 좋아 17살 때부터 이미 바리톤 가수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여 후에는 이름난 오라토리오 가수로 활동하였다. 그는 청년 시절부터 자기보다 몇십 년 연배인 루트(G.F.Root,1820-1895)나 웨브(G.J.Webb, 1803-1887)와 같은 당대 뛰어난 찬송작가를 따라다니며 함께 활동하게 되면서 그들로부터 음악 레슨도 받게 되고, 평생 막역하게 지냈다고 한다. 1870년부터 12년 동안, 뉴욕의 빙햄턴(Binghamton)에 있는 100주년 감리교회의 음악감독으로 섬겼고, 1882년부터 신시내티에 있는 요크스트릿 감리교회, 유니언감리교회 등에서 음악감독으로 1893년 시카고의 무디성경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죽기까지 26년 동안을 가르쳤다. 1900년 테네시주 해리만에 있는 미국절제대학(The American Temperance University)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작품을 발표할 때 'Robert Beverly' 라는 아호도 사용하였다.

 

1절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예수 함께 아니 가면 낙 없고 항상 예수 함께 가면 겁없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복의 근원이 된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1-2)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길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나 믿음으로 순종하여 앞으로 나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때는 부족사회로 고향을 떠나 다른 마을로 이주해 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미친 짓과 다를 바가 없었던 때였습니다. 이런 순종의 믿음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에게 명령하신 그 명령이 지금 우리에게 임하여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것처럼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9:23-24) 명령 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실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그렇게 용감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라갔듯이 순종하며 따라갈 것입니까? 아니면 가룟 유다처럼 저주하고 떠날 것입니까? 정말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났고 구원받은 믿음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든지 아브라함처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나서야 합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순종함으로 믿음의 길을,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함에도 주저하며 불순종하는 것은 그 속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 물질에 대한 걱정 등...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길을 걷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요일 4:18) 하박국 선지자 또한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경지를 발견해야 합니다.”(3:17-18) 이러한 믿음과 사랑의 관계를 회복한 사람은 어디로 나를 이끌던지, 예수님과 함께 가려네. 예수 함께 아니면 낙 없고 예수 함께 따라가면 겁 없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를 가든지 예수 함께 계시네”(1)를 즐겁게 부르며 따라갈 것입니다.

 

2절 세상 친구 모두 나를 떠나도 주와 동행하면 외롬없겠네

가는 길이 위태하고 험해도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맨 처음 집을 나설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이 많았을 때는 그 가진 재물로 인하여 주위에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친구들의 겉치레 칭찬으로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인 줄로 착각하고 호의호식하며 방탕함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가진 돈이 다 떨어지자 그 많던 친구들이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둘째 아들의 곁을 떠났습니다. 하루는 둘째 아들이 너무 배가 고파서 친구의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습니다. 친구는 언제 보았느냐? 며 내어 쫓았습니다. 심지어는 심한 욕설과 매질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둘째 아들은 친구들로부터 매정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하루아침에 거지 신세가 되어 노숙자로 전락하였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삭막한 밤거리에 나 홀로 앉아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원망과 후회를 했을까요? 이제는 얻어먹을 것이 없어 돼지들에게 주는 쥐엄 열매라도 얻어먹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주는 이가 없어 쓰디쓴 배고픔의 고통을 안은 채 밤을 지새워야 합니다.

둘째 아들은 그제야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다 받아 챙겨서 나왔기 때문에 아들의 신분으로 아버지 집에 돌아갈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집에 있는 종의 한 사람으로라도 써달라고 부탁하리라!”며 마음을 정하고 용기를 내어 아버지 집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집에 가까웠을 때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의 생김새와 걸음걸이를 보고 한눈에 자기의 아들임을 알아보고 맨발로 뛰어나가 얼싸안으며 기뻐함은 물론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Rembrandt(1661–1669)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Rembrandt(1661–1669)

이처럼 세상 친구는 날 버리고 날 비웃어도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며 항상 넉넉함의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갚아주시는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주님 앞에 돌아가기만 하면 우리는 외롭지 않습니다. 위태하지도 않습니다. 배고픔도 없습니다. 오직 기쁨과 즐거움뿐입니다. 그러므로 없어질 세상 쾌락을 추구하며 살기보다는 영원한 생명과 참 평강을 주시는 예수님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며 뛰어노는 친구 관계, 영원한 우정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비록 주님을 따르는 것이 험난해 보일지라도 세상의 고통은 잠깐이요 내일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즐거움과 쾌락을 떨쳐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가기만 하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에게 참 평안과 영생의 축복만이 있을 것입니다.

 

3절 어둔 그늘 나를 에워쌀 때 주가 함께 계심. 믿고 자려네

죽은 후에 천국에서 깨어나 예수 함께 길이길이 살리라.

 

우리가 주님을 쫓는 이 길은 잠깐 쫓다가 뒤돌아서는 길이 아니요, 영원히 주와 함께 걷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그늘 에워싸고 환난이나 시험이 닥쳐와도 주님 지고 가신 골고다 그 언덕길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남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믿음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819절에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말하기를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예수님을) 좇으리이다.”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居處)가 있으되 오직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8:20)고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에게 이같이 말씀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첫째, 세속적이고 탐욕적인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따르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많은 군중과 이적들, 그리고 열광적인 환호성을 보면서,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서 있는 예수님과 교제하며 관계를 갖는 것이 자신의 활동영역을 높이고 이름을 알리는 일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마치 회사 대표나 사장님 그리고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사업과 투표에 도움을 얻고자 교인으로 등록하며 예수 믿는 신자처럼 행동하려는 모습과 동일합니다. 이렇듯 서기관도 예수님을 빵과 부와 명예와 권력과 이 세상 행복을 가져다줄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기고 따르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같은 오해를 바로잡고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둘째, 주님을 따르는 길이 고난의 길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선별적으로 예수님의 좋은 점만, 매력적인 면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 그 이면에 숨겨진 십자가 희생의 섬김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중복음 삼박자 축복은 현시대에 맞지 않습니다. 만사형통만을 꿈꾸는 성도는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조그만 어려움이 닥쳐도 예수님을 원망하며 교회를 떠나는 시대에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 가운데 또 다른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제자는 열두 제자 중 하나가 아닌 넓은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신앙을 고백한 제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하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주님의 대답은 단호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8:22)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고 싶었을까요?

서기관의 자기중심적인 열정과 성공의식을 가지고 주를 쫓으려고 하였던 반면 반대로 사역에 대하여 소극이고 미온적인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어떡하든 핑곗거리를 만들어서 자기합리화를 시키며 구경꾼으로만 있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첫째, 구원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믿으라는 전도를 받을 때 이런 식으로 대답합니다. 아이들을 좀 키워 놓고서, 사업의 기반을 좀 다져 놓고서, 돈 좀 벌어 놓고서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예수를 믿는 일보다 우선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아니 됩니다.

둘째, 헌신의 기회를 상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제자가 즉시 결단하고 따르지, 아니하면 영구히 따르지 못할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믿는 일을 후일로 미룹니다. 교회 나가는 일을, 교회의 직분자 일을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후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향하여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4:4), “너는 내일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27:1)고 하였습니다.

 

제가 은성수도원에 있을 때 엄두섭 목사님이 자주 외치던 이현필 선생이 있었는데 그가 쓴 글을 노래로 만들어서 불렀는데 그 내용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태산준령 험치 않소

방울방울 땀 방울만 보고 따라가오리다.

주님 가신 길이라면 가시밭도 싫지 않소

방울방울 피 방울만 보고 따라가오리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바다 끝도 멀지 않소 

물결물결 헤엄쳐서 건너가서 뵈오리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하늘 끝도 높지 않소

날음날개 훨훨 쳐서 올라가서 뵈오리다.

이런 자세로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영화 순교자의 길처럼, 또는 360장에 나오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천국의 예루살렘성에서 받기까지달려가는 의의 길, 믿음의 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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