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한국교회 초기 역사를 쓴 조지 히버 존스 선교사

  • 입력 2024.06.13 11:16
  • 수정 2024.06.13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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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369)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81)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오데 아도나이 케찌드코)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7:17).

세상은 요란하다. 세태는 요지경처럼 변화무쌍함으로 변하며 정국은 진흙탕 속의 전쟁을 일삼는 형국이다. 북쪽은 남쪽의 대북 선전 풍선 보내는 것에 대응하여 오물을 실은 풍선으로 맞대응하여 경기도 일대는 악취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점점 더 싸움의 각을 세우며 전쟁으로 치닿는 모습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평화가 이 한반도에 있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다윗은 그 평화의 간구를 이 시편 탄식에서 시작되는 기도에서부터 원수의 심판과 재앙을 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갈구하고 있다. 그 구원이 결국 회개에 있음을 밝히며 시편 7편의 기자는 말하고 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요(임 로 이슈브 하르보 일토슈)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7:12).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호쉬에니 미콜 로드파이 웨하찌레니)”(7:1). 하나님의 속성이 변함없는 사랑(헤세드)이시며 그 인자하심이기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 대하여 지극한 사랑으로 구원하시는 손길을 펴며 지속적으로 개인과 공동체에 그 사랑을 행하심을 보인다. 때때로 구원(야사)이라는 말로 사용하며 명령형의 형태로 탄식 시편에서 표현하며 하나님의 속성을 보인다(시편 7:1; 22:21; 28:9). 때때로 구속(가알, 파다)’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근원 뿌리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본성을 표현한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7:7). 하나님의 구속을 통한 온 민족의 통치자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높이고 주권자 임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아도나이 야딘 아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7:8). 개인 탄식시편이 우주적, 공동체, 민족의 구원과 심판에 이르는 광범위한 확대를 보여준다(쉬미트, 3-5; 7; 11; 13; 17; 25-27; 31; 35; 38-39; 41-42/43; 52; 54-59; 69; 77; 86; 88; 94; 102; 109; 139-140; 142). 불공정한 고소를 당한 사람들의 시편으로서 시편 기자는 마음과 양심의 차원을 거론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한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이게마르 나 라 레샤임 우테코넨 짜디크)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7:9). 이 시인의 성격이나 품성이 인간의 몸의 한 부분을 언급하며 표현된다. 심장(케라요트)은 시편 7:9에 표현되며 마음(레브, 레바브)으로 표현된다. (lever)이 영광으로 표현되며 영광(카보드)과 언어유희를 하면서 이 간의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준다고 한다(7:5; 16:9; 30:12).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셀라)”(7:5).

시편의 탄식의 세계는 인간 세상의 온갖 질곡의 상태, 사단칠정의 고통의 세계를 보여주며 인간과 공동체, 인간과 사회,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담고 있다. 우주의 통치자 하나님의 구원을 세계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없이 빼앗았거든(임 가말티 쇼레미 라 와아할레짜 쪼르리 레쾀)” (7:3-4). 이처럼 시인은 인생의 문제가 대적자와 문제의 원인이 있음을 알고 그 죄악에 있다는 것을 알며 하나님께 그 원인의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구원을 바라며 간절히 구한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엘로힘 쇼페트 짜디크 웨엘 조엠 베콜 욤)”(7:10-11). 이 시편은 왕정 시편은 개인 탄식시편으로 우주적인 왕의 통치를 보여준다(크로포트, 3; 5; 7; 9/10; 22; 23 등등). 이 시편 7편에서는 회개가 가장 중요한 구원의 단초가 됨을 보여준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야슈브 아말로 베로쇼 웨알 콰드코도 하마소 예레드)”(7:13-16). 인생의 문제의 원인을 죄악과 대적자, 원수과 만민, 민족들의 심판에 있음을 알고, 시인은 우주적 통치자로서 왕이 하나님이 되시며, 만민의 심판자가 되심에 있음을 강조한다. 회개에서 시작되는 구원의 시작은 열린다. 하지만 회개하지 않을 경우 대적자의 심판과 칼과 활, 죽일 도구, 불화살이 도래하며 회개하지 않고 교만하며 주님께 항복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연속되는 재앙과 심판은 구원받지 못할 상황으로 전개될 것을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의 의와 구원으로 말미암아 시인은 감사하고, 악인들의 재앙과 그들의 웅덩이와 함정이 그들에게 돌아가는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이 이뤄짐을 극적으로(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구원의 세계를 보여준 선교사님이 있다.

조지 히버 죤스(G. H. Jones, 1867- 조원시, 趙元時) 선교사는 최초의 통사(한국 교회 형성사)를 쓴 선교사이다. 그는 1884-1916년까지 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를 한세대 30년의 역사를 쓴다. 이 책은 조원시 선교사가 대한제국의 역사를 1917년에 집필하며 기록한 것을 1919년 그의 사망으로 잠자던 유니언 신학교 도서관 고문서실의 원고를 발굴하여 세상에 알린다(옥성득). 이 통사는 백낙준 박사의 1927년 한국 개신교사(1832-1910)보다 10여 년 앞선 작품이다. 최초의 한국 개신교 통사로서 한국의 교회의 여명(The Rise of the Church in Korea)이라는 제목으로 떠오르는 교회가 한국의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 이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새롭게 변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존스 선교사는 선교사관의 입장에서 개신교 한국 전래사를 교회사의 관점에서 신학적 언어로 서술했다. 그의 선교사관은 토착 교회의 형성에 초점을 두고 있으며 신학 박사의 논문과는 달리(백박사), 신학교 강의를 바탕으로 미국 평신도들에게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문학적 이야기체로 쓰여졌다. 존스 선교사는 한국 선교 초기 역사에 대한 개괄적인 서술과 한국인과 한국 지리, 선교사들의 활동과 역경, 토착 교회의 형성 등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선교를 위해 한국 이곳저곳을 다니며 전혀 모르는 한국어를 배우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유불선을 소개하는 종교 생활, 하나님 신 사상, 인간의 도덕적 책임, 예배와 기도, 영혼불멸 사상, 토착종교와 기독교 접촉점, 무신론이 아닌 다신론 속에 최고 신이 통치한다는 하나님 개념은 실제적인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본다. 존스는 짧은 30년이 선교역사에서 볼 때 한국 선교 30년은 100년의 성취를 거둔 만큼의 괄목한 성장을 하였다고 본다.

조지 죤스 선교사와 그의 책 한국 교회 형성사, 옥성득 편역
조지 죤스 선교사와 그의 책 한국 교회 형성사, 옥성득 편역

은자의 나라, 조용한 아침이 나라에 뒤늦게 찾아온 벽안의 외국인들은 책에서도 등장하듯 풍토병과 갖가지 사고로 수많은 피를 흘리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 짧은 30년간의 마지막 사건은 선교사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 이후 100년간 수많은 열매를 거둔 가장 위대한 사건의 하나였다. 존스 선교사는 뉴욕에서 태어나 1881년 부흥회에서 회심하고 1887년 한국에 파송되어 18885월 감리교 선교사로 네 번째로 한국에 오게 된다. 그는 1891년 배재학당에 교사와 교장으로 봉직한 후, 1892년 제물포 선교 관리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내리교회 2대 담임 목회자가 된다. 인천 영화 학교를 세웠고 이후 인천, 강화, 부평, 부천, 황해, 연안, 남양 등지의 선교지를 세우며 1903년까지 44개의 교회를 개척한다. 1894년 내리교회에 한국 최초의 여성 전용 예배당을 세웠고 1901년에는 인천 최초의 서구식 제물포 웨슬리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존스 선교사의 폭발적인 선교를 이룬 역사, 그 사도행전적 선교는 잘 가꾸어져서 옥토에 뿌려진 씨앗처럼 복음과 성령의 빛의 놀라운 확산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반도는 30여년의 기적적인 복음의 폭발을 경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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