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를 깨우지 못하면 영원한 수면이 뒤를 따른다.
당신의 삶에서 엘리가 깨어 있을 때 당신 역시 은혜와 축복 가운데 거했다. 당신 안의 엘리가 경성해 있을 때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사모했으며 주님의 일에 열심이었다. 잃고도 감사했으며 베풀기를 무엇보다 기뻐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모습은 그러지 못하다. 당신은 받기를 좋아하고 나누기를 꺼려한다.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적극적이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하긴 하지만 성실함이 사라지고 기쁨도 결여되었다. 자주 잠들기를 좋아하는 당신의 영적 게으름으로 인해 사탄은 당신을 애지중지하고 성령님은 근심에 잠긴다. 성령의 근심을 전혀 감지하지 못한다는 영적 불감증이 당신의 위기 상황을 더욱 부채질한다.
형통한 삶은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바싹 메말랐고 저주와 아픔과 실패와 고통이 당신의 영혼을 괴롭힌다. 거룩한 사람들이 당신 곁에 다가오기를 께름칙하게 여기고 악한 동무들이 당신 삶의 주변을 맴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표현처럼 당신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예전의 동지들과 사뭇 다르다. 의(義)를 위해 뭉치지 않고 이(利)를 위해 모였다. 당신에게서 어떤 형태의 단물이라도 남아있는 한 그들은 당신에게 호감을 갖고 입 안의 혀처럼 굴 것이다. 그런데 당신의 상황이 이전 같지 못할 때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이들은 썰물처럼 쓸려 갈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그들이 돌아올 도래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로운 무리들도 영적 민감성을 잃어버린 당신 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다. 그들도 살아야 하고 무한한 영계에서 전진과 비상을 계속 이루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깨닫지 못한 당신은 아무 위기감도 느끼지 못한 채 죽은 시체처럼 자주 몸을 눕힌다. 애초에는 불안감으로 간혹 깨기라도 했는데 이제는 잠이 주는 달콤함에 영적 부담감마저 사라져버렸다. 결과적으로 풍성했던 수원지의 물은 마르고 은혜의 물줄기가 줄어들어 삭막해졌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순식간에 임할 것 같은 분위기이다. 아, 지난날을 회상하고 현실을 직시하면 당신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두렵기만 하다. 망설일 시간이 없다. 더 지체하다보면 들이닥칠 파국에서 벗어날 갈이 없다. 원컨대 당신 자신의 내부에서 잠들고 있는 엘리를 빨리 깨워라! 죽음을 부르는 잠, 죽음으로 향하는 수면 상태에 놓인 당신을 흔들어 깨어야 한다. 나이 이상으로 늙어버린 당신의 엘리를 할 수 있는 한 젊게 만들어야 한다.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반짝이게 만들라! 저는 다리에 힘을 싣고 안락을 사랑했던 마음의 침대를 부수어 바쁜 걸음을 걷게 만들어야 한다. 엘리가 깨어나지 않으면 그 다음에 닥치는 것은 영원한 수면뿐이다. 아직은 잠들 때가 아니다. 적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절망의 벽에 갇혀 탄식하는 영혼들의 소리가 천지에 가득한데, 사탄의 전무후무한 공격이 세상을 향해 쉴 새 없이 덮쳐오고 있는데, 하나님의 침묵이 마지막 정점에 다다랐는데, 용사로 부름 받은 당신은, 메신저로 세워진 당신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야 한다. 자리를 걷고 신을 신고 한 손에 횃불 들고 다른 손에 창검을 쥐고서 적을 향해 냅다 돌진해야 한다.
오늘 이 시대의 비극은 자다가 깰 때가 되었음에도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모든 이가 잠들어도 깨어야 할 사람마저 잠들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파수꾼은 모든 이가 잠들었을 때에도 깨어 망루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이 시대의 파수꾼으로 세워주셨다. 지도자의 깊은 잠, 그리스도인들의 졸음상태, 이것이 이 시대의 절망을 더욱 참담하게 만든다. 오늘 현대 교회의 위기는 지도자들이 깨어있지 못함에 있다. 비둔해진 엘리의 몸뚱이처럼 욕심과 안락에 길들여져 영적인 민감성을 잃어버렸다. 아이 사무엘이 성전을 지키고 있을 바로 그때에 자기 처소에 몸을 눕혔던 엘리 제사장처럼 어린 신자들이 깨어 불 밝혀 기도하는 그 시간에 먼저 믿은 신자들과 영적 지도자들은 편안한 잠을 자는 형국이 오늘 조국 교회의 모습이다. 이민 교회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다. 영혼의 잠자기를 즐겨하는 죄악을 우리 모두 회개해야 한다.
당신 자신의 내부에서
잠들고 있는
엘리를 빨리 깨워라!
잠든 엘리를 깨우고 기도하는 사무엘을 고무시켜라!
교회의 연약함은 지도자가 잠에서 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부자리는 개었어도 여전히 몽환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도의 어려움은 일차적으로 성도 개개인의 영적 상태에 원인이 있는 것이지만 기도해야 할 지도자가 기도하지 못한 잘못도 간과할 수 없다. 더 많이, 더 자주, 더 깊이, 더 뜨겁게 기도하지 못하는 죄로 인해 양떼들이 당하는 고난의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성도가 어려움 가운데 놓여 있음도, 형통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함도, 시험과 올무에서 괴로움 당함도 모두가 파수꾼으로서 깨어있지 못한 지도자의 불충에 있다. 목자가 제 시간에 깨지 못하면 양떼들은 굶주리거나 이리떼의 먹이가 되어버린다.
누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라! 일어나서 부지런히 할 일을 찾아라!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열정을 쏟아라! 당신이 잠들면 우는 사자와도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 헤매는 흑암의 사자(使者)들이 당신의 영혼을 덮친다. 당신이 깨어있지 않으면 사탄이 빛의 천사로 나타나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둠 속으로 유혹해 갈 것이다. 당신의 삶에서 늙은 엘리를 추방하고 어린 사무엘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잠든 엘리를 깨우고 기도하는 사무엘을 고무시켜야 한다. 천만다행으로 제사장이 잠들더라도 제사장을 시중들던 사무엘이 깨어 있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등불을 지킬 수 있었다. 설혹 피곤을 이기지 못한 지도자가 일시적으로 잠들지라도 그를 보좌하는 성도들이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한 교회는 망하지 않는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여 내려올 때 좌우에서 받쳐주었던 아론과 훌이 있었기에 여호와닛시의 승리는 깃발처럼 펄럭일 수 있었다. 영적 지도자들은 졸며 자는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목자의 사명 완수를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의 등불 된 교회가 그 거룩한 빛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깨어 기도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절망적인 세상을 감당해야 했고 희망할 수 없는 지도자로 인해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감당하기 힘든 갑절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반역하는 이스라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외면치 않으셨다. 천지사방이 절망으로 가득했지만 희망의 징조마저 거두지는 않으셨다. 점점 눈이 어두워지고 성소 밖의 처소에서 잠든 엘리와는 달리 성소 안에 한 소년을 준비시키셨다.
엘리가 절망의 상징이라면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세상이 어둠 속에 잠겼어도 여호와의 등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것이 세상 역사를 이끄시고 자신의 몸 된 교회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다. 구약에 두드러진 하나님의 역사가 그러했다. 사막에 오아시스를 숨겨두듯 혼탁한 시대마다 반드시 빛을 발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남겨두셨다. 그들이야말로 거룩한 그루터기였고 남은 자였으며 소수의 경건한 무리인 씨앗이었다. 당신이 절망적인 시대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 시대가 주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요 당신이 절망적인 인간들에 둘러싸여서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등불이 아직도 꺼지지 않았음을 믿기 때문이다.
당신의 삶에서
늙은 엘리를 추방하고
어린 사무엘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불씨가 남아있는 한 꺼진 불은 꺼진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불이 꺼졌으나 마지막 불씨마저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불씨는 성소에 아직까지 꺼지지 않은 여호와의 등불과 여호와의 전 안에 누운 사무엘 그리고 사무엘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실려 나타났다. 이 불씨로 인해 이스라엘은 희망의 시대를 노래하고 희망의 인간을 기다리며 희망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불씨가 남아있는 한 꺼진 불은 꺼진 것이 아니다. 불씨는 불을 되살리는 불의 눈이요 핵이며 생명이다. 꺼지지 않은 등불과 소년 사무엘과 여호와의 소리는 바로 소망의 불씨였다. 그것은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던 위기 속에서라도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 천인을 따로 남겨두셨던 하나님의 배려와 흡사했다. 그것은 모두가 사라진 자리에 홀로 남아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켰던 엘리야의 존재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진과 폭풍의 소리를 뛰어넘어 한순간 귀머거리가 된 엘리야의 고막을 깨웠던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었다.
사람들이 불꽃을 사그라지게 하고 빛을 어둡게 해도 불씨를 간직케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경 역사는 불꽃을 끄려는 악한 세력과 불씨를 간직하려는 하나님과의 영적 대쟁투를 보여주며 언제나 잿더미 속에서 불씨를 일으키신 하나님이 궁극적 승리자가 되셨다. 에덴동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신천신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일으키신 불씨들이 “남은 자”(스페르마)가 되고 “거룩한 씨”(휘포레임마)가 되어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다. 엘리의 시대와 사무엘의 시대가 교차되는 그 시대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절망이었고 희망이었다. 엘리를 바라보면 회색 잿더미가 수북이 쌓여있었지만 사무엘을 바라보면 벌건 불씨가 숨을 내쉬고 있었다. 엘리를 통해서 그 시대를 관찰하면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지만 사무엘을 통해 바라보면 여호와의 소리가 아직도 건재했다. 엘리에게는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을지라도 사무엘에게는 비전과 꿈이 충만했다. 성소 밖에 누운 엘리가 절망의 덩어리라면 성소 안에 누운 사무엘은 소망 자체였다.
꺼지지 않은 등불과
소년 사무엘과
여호와의 소리는
바로 소망의 불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