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한국 개신교의 위기를 불안스럽게 바라보면서, 뚜렷한 길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시대적 상황앞에서 성원용 목사의 저서 [위그노처럼, 국민북스]는 우리 기독인들이 읽으면 가뭄 속에서 시원한 생수를 마신 것과 같은 힘을 얻을 것으로 본다. 위그노들의 신앙의 여정은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한국개신교의 위기는 내적으로는 맘몬에 지배당하고, 외적으로는 예배의 자유와 평등권에 심각한 차별을 받으면서,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프랑스 개신교 위그노역사에서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찾아보면 좋을듯싶다.

위그노라는 단어가 우리들에게 낯선 용어처럼 들려오지만, 일제시대와 공산주의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주기철목사, 손양원목사, 문준경전도사를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된다.

위그노’(Huguenots)라는 말은 독일어 아이트게노센’(Eidgenossen)에서 왔다. 이는 동맹또는 하나의 가르침에 의해서 연결된 동지들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를 축약해 아이그노트’(Eignot)라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위그노’’(Huguenots)가 되었다. 이것은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에 동참한 프라이부르크와 베른의 동맹에서 유래 되었고,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장 캘뱅의 신학을 따르는 16세기에서 18세기 프랑스 개신교인들을 가르치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위그노라는 말이 프랑스 왕국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560년부터이다.

프랑스 개신교 위그노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프랑스인들의 정신속에 흐르는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키워드가 있다. 광야교회시대’, ‘위그노’, ‘위그노 십자가’, ‘레지스터’(저항하라), ‘톨레랑스’, 망치와 모루, '디아스포라 위그노' , '카미자르 정신'이다.

 1572년 8월 24일 발생한 위그노 학살 사건인 ‘성 바톨로매 축일 대학살’ 그림이다. 이 사건으로 파리에서만 3000여명이 죽고 프랑스 전역에서 3만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다.
 1572년 8월 24일 발생한 위그노 학살 사건인 ‘성 바톨로매 축일 대학살’ 그림이다. 이 사건으로 파리에서만 3000여명이 죽고 프랑스 전역에서 3만명 이상이 죽임을 당했다.

'광야교회시대'

18세기 프랑스 개신교 역사에 102(1685-1787)은 고난과 핍박의 시기이다. 이 시기를 프랑스 교회사가들은 광야교회시대라고 부른다.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칙령을 폐지하였고,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했다. 위그노의 씨를 말릴 정도로 박해가 냉혹했다. 강제개종을 강요당했다. 거부할 경우 투옥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선에 끌려갔다. 그리고 루이 16세가 관용 칙령으로 불리는 베르사유 칙령(L`edit de Versailles, 1787.11.7.)를 선포할 때까지 102년 동안 프랑스 위기노들은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1562년 프랑스 개신교회가 2000여개가 세워졌고, 200만 명의 교인은 프랑스 인구의 11%가 된다. 프랑스 개신교의 부흥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3가지 발생했다. 첫째는 바시의 학살’(1562.3.1.)이다. 바시의 창고에서 예배중이던 개신교도들을 공격하여 74명을 죽이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둘째는 위기노 전쟁이다. 앙리 4세가 낭트칙령’(1598.4.30.)을 선포하여 개신교도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할 때까지 37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땅은 폐허가 되었다. 셋째는 성 바돌로매 대학살 사건’(1572.8.24.)이다. 이 사건으로 파리에서 3000여 명이 죽고 전국적으로 3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성원용 목사로부터 배우는 제자의 길"

성원용목사, 파리선한장로교회 담임, 장로회신학대학교(Th.B/M.Div). 미드웨스트 유니버시티 리더십으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로 '본질을 붙들면 후회하지 않는다'
성원용목사, 파리선한장로교회 담임, 장로회신학대학교(Th.B/M.Div). 미드웨스트 유니버시티 리더십으로 박사학위 취득,  저서로 '본질을 붙들면 후회하지 않는다'

 

성원용 목사는 위그노에게 배우는 10가지 핵심 교훈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메세지는 오늘 풍요가 곧 신앙의 본질이며 축복의 최고봉인것처럼 거들먹 거리는 변질된 우리 신앙인들에게 참된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던져주고 있다.

 

'용기를 내라'

프랑스 최초의 개신교의 시작과 최초의 개신교 총회가 한 가정집에서 시작되었다. 집 주인은 르 비콩트이다. 부인과 아버지가 집 지하실을 개신교 예배 장소로 제공했다. 개신교도를 향한 박해의 칼날이 서슬퍼런 시대였기에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1555년에 이 집에서 프랑스 개신교 최초의 유아세례를 집례했다. 당시 개신교 목사가 없었다. 성도들은 금식과 기도를 한 후 22세 장 르 마송 드 로네(1533-1572)를 프랑스 개신교 최초의 목사로 선출하여 최초의 세례식를 집례하였다.

장 르 마송은 고위 관료 아들이었다. 아버지 아들을 성공시키기 위해 법관 공부를 시켰다. 그는 종교개혁 사상에 매료되어 제네바로 가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기의 모든 유산을 물려주겠다면서 개신교 사상을 버리라고 했다. 그는 신앙을 위해서 아버지의 유산을 포기했다.

 

'고난을 감당하라'

망치와 모루, 위그노들의 고난을 상징
망치와 모루, 위그노들의 고난을 상징

 

위그노의 정체성과 고난을 나타내는 상징들이 있다. 위그노 십자가, 분리형 강대상, 분리형 성찬 잔, 망치와 모루이다. 이것들은 위그노들이 박해와 광야교회 시절을 통과하면서 만들어졌다.

개신교인들의 집에는 항상 '위그노 십자가'가 달려 있다. 위그노 십자가는 위그노의 정체성을 담아낸 상징물이다. 그들의 십자가에 위그노의 고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일반적인 십자가의 형태가 아니라 귀족들이 가슴에 달린 훈장과 비슷한 형태이다.

위그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망치와 모루'는 위그노들의 박해를 상징한다. 위그노들은 망치와 모루 사이에 놓였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망치질은 위그노를 박해하는 세력을 의미하고, 위그노들은 박해받는 존재들이다. 망치와 모루 사이에 기록된 문장이 던져주는 메시지가 의미심장하다. “그들이 나를 망치로 두들기면서 즐거워할수록, 그들은 더 많은 망치를 닳아 없어지게 만들 것이라는 글이 새겨져있다. 망치로 아무리 두둘겨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위그노들의 신앙의 모습을 담고 있다.

박해를 이기고 승리하는 길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성도의 인내다. 위그노들은 용기와 인내로 결국 박해를 이기고 승리했다.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망치와 모루 그림에서 부러진 망치와 성경책이 보인다. 박해의 망치를 부러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이다.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라'

위그노의 망명은 1572824일에 파리에서 발생한 성 바돌로매 대학살 사건으로 촉발했다. 더 이상 프랑스에서 개신교 신앙을 유지하며 살기 어렵게 되자. 위그노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 인구 1800만 명중 개신교 인구는 200만이었다. 그중에서 100만 명의 위그노들이 디아스포라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나서 모든 땅으로 흩어졌던 것처럼, 위그노의 역사도 비슷했다. 독일로간 4만 여명의 위그노들은 베를린에서 엘리트 계층이 되었고 제조업과 기계산업을 육성하였다. 네덜란드로 간 5만 여명 위그노들은 해양 강대국을 만들었고, 영국으로 간 4만 여명의 위그노들은 산업혁명의 주역이 되었고, 스위스로 망명한 위기노들은 정밀시계산업과 금융업과 사회봉사 기관을 세워갔다. 1200여명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여 현재 유레이즈미업이라는 최상급 포도주 산업을 일으켰다. 미국으로 망명한 위그노들은 예술가와 엔지니어 등 지성인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미국사회에 적응하여 지도층이 되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비롯한 7명의 미국 대통령을 배출했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데 위그노의 신앙과 정신을 들고 왔다.

개신교 박해로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면서 심각한 인재 유출로 인해 재정, 기술, 예술, 재등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프랑스 땅에서는 가톨릭 성직자와 귀족 계급이 독주하게 되었다.

세계적 투자가 짐 로저스는 폐쇄된 나라는 망하고 개방된 나라는 흥한다. 이민자를 받아들이는 나라는 번영하고 거부하는 나라는 쇠퇴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필연이다.”라고 말했다. 디아스포라 위그노들을 받아들인 나라는 번영를 이루고 역사의 승자가 되었다.

 

'저항하라': 카미자르 정신을 회복하라

저항하라는 뜻의 레지스터’(Resister)는 프랑스 개신교인들의 영혼에 깊이 새겨진 단어이다. 레지스터는 개신교 신자들의 좌우명과 정체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레지스터의 명사형은 레지스탕스’(Resistance). 레지스터는 20세기 중반 프랑스 위그노의 정신을 이어간 현대사의 자존심을 지켜낸 레지스탕스의 유래가 되었다. 앙드레 뒤카스는 레지스테는 독일 나치즘과의 콜라보라시옹(2차 세계대전 당시 비쉬 정부의 대독 협력 정책)에 반대하는 모토이자 레지스탕스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고 했다.

프랑스 위그노의 상징적인 인물은 마리 뒤랑’(Marie Durand, 1729.7.15.~)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개신교 신앙으로 교육을 받으며 위그노로 성장했다. 마리 뒤랑은 1730719살 나이에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저항하면서 38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다. 감옥에서 동료들을 돌보며 영적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다. 그녀를 상징하는 단어는 저항하라’(레지스테Resister)이다.

마리 뒤랑은 감옥 중심에 있는 물을 길어 올리는 구멍 주위에 글을 새겼다. ‘저항하라이다. “비진리에 저항하고,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고, 복음을 위해 저항하라"는 말이다. 그 글을 매 순간 바라보면서 그녀는 고통스러운 삶과 카톨릭의 회유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다시 세우고 방황하는 동료들의 마음을 붙들어 주었다. 그녀가 돌에 새긴 레지스테는 이후 프랑스 개신교들의 영혼에 새겨졌다. 그것은 개신교 신자들의 좌우명과 정채성이 되었다.

루이 14세에 의해서 개신교 예배 참석 금지된 상황에서 그녀의 집은 광야교회장소였고, 예배 참석했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체포되었.

광야교회 목사였던 오빠 삐에르 뒤랑(1700-1732.4.2.)32살 나이에 몽펠리에 광장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그는 오직 진리를 선포했고, 진리대로 살았다. 마지막 교수대앞에서 큰소리로 시편을 노래했다.

재판소 서기였던 아버지 에티엔 뒤랑과 어머니도 1729년에 체포되어 14년 동안 갇혀 있다가 죽임을 당했다. 개신교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온 가족이 체포되어 순교의 길을 걸었다.

위그노들은 국가와 종교 권력의 폭력앞에서 오직 신앙과 양심의 자유와 진리를 위해 기존 질서에 저항했다. 종말론적 예언 운동에 영향을 받아 위그노들은 게릴라 부대를 만들어서 무력으로 저항했다. 급진적 저항운동을 이끈 부대가 카미자르(Camisard). 그 이름은 그들이 입었던 카미자(Camisa)라는 옷에서 기인했다.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했던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의 마음과 같았을 것이다. 당시 독일교회는 히틀러를 메시아니즘의 도래로 이해하며 그의 광기에 협력했다. 본 회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주로 고백할 수 없다는 바르멘 선언을 통해 독일 교회의 마지막 양심을 지켰다. 그는 미친 자에게는 운전대를 맡길 수 없다. 운전석에서 끌어내려야 한다며 히틀러 암살 계획을 세웠지만 발각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국가와 종교 권력의 폭력앞에서 신앙의 양심과 자유를 지키려고 저항했던 카미자르 정신은 프랑스인들의 가슴에 늘 살아 있다. 이 정신은 부패한 왕권에 맞섰던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졌고, 20세기에는 나치의 불의에 저항했던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다시 살아났다. 세벤느의 카미자르 후손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숨겨주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세벤느 지역의 대표적인 레지스탕스였던 자크 푸졸은 이렇게 호소했다.

세벤느의 자랑스러운 자녀들이여, 반항자여, 저항자여, 그대들의 혈관 속에 카미자르의 순수한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라.”

 

'개혁자로 서라'

종교개혁의 중심지에는 개혁자가 있다. 1세대 종교 개혁자는 마르틴 루터이다. 1517년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 성곽 교회문 앞에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개혁은 사람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구원론에 방점이 있다. 루터는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 얻게 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임을 주장했다. 루터의 중세에 무너진 성자 신학을 완성했다.

프랑스 누아용에서 태어난 장 칼뱅은 2세대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믿음과 은혜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강조점을 두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는 칼뱅 신학의 중심축이다. 칼뱅 신학은 성부 신학을 완성하였다. 칼뱅신학은 개인을 넘어 사회개혁으로 영역이 확대된다. 그는 제네바를 신정 도시로 만들려 했다.

장 캘뱅은 부르신 주님의 사명을 위한 종교개혁 완수를 위한 위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문구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신실하게이다. 개혁자로 산다는 것은 그 길을 나서기 까지 망설이고 또 망설이지만 일단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서는 순간, ‘즉각적이고 신실하게자신의 심장을 도려내어 주님께 드리는 삶, 그것이 개혁자의 삶이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제자들은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즉각적이고 신실하게주님을 따랐다.

 

'톨레랑스하라'

톨레랑스’(Tolerance)관용이라는 말이며, 라틴어 ‘tolerare’에서 온 프랑스어로서 참아낸다는 뜻이다. 사전적 의미로서는 우리가 찬성하지 않는 것까지도 허용할 수 있는 역량이다.

장 칼뱅은 1532세네카의 관용론 주석을 출판했다. 세네카가 네로에게 톨레랑스의 가치를 말한 것처럼 칼뱅은 프랑스 군주 프랑수아 1세에게 톨레강스 가치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지금 이 시대는 톨레랑스가 필요한 시대이다. 왕은 새로운 물결인 르네상스 인문주의를 받아들이듯 새롭게 일어난 개신교 신앙에 대해서도 관용해달라는 메시지를 담았서 책을 출간하였다. 칼뱅의 책이 출판된 지 18개월 만에 프랑스 땅에서 벽보사건’(1534.10.17.)의 발생으로 인해 대대적인 위그노 박해가 시작되었다. 벽보사건은 개신교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고 가톨릭교회의 미사를 비난하는 벽보가 파리 시내와 주요 도시에 붙어졌다.

앙리 4세는 개신교도로 자랐지만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는 왕이 될 수 없으므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앙리 4세는 낭트를 정복하고 1598413일 개신교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선포했다. 앙리 4세는 위그노에 대한 톨레랑스를 법제화하고 그 정신을 프랑스 땅에 널리 펼치려 했지만 광신적 가톨릭교도인 프랑수아 하바이약의 칼레 심장을 찔려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가 왕이 되면서, 할아버지가 선포했던 낭트 칙령을 16851018, 몽텐블로 칙령을 통해서 폐지해 버렸다. 이때부터 프랑스에서는 톨레랑스는 없는 무지비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톨레랑스의 실종은 국가와 백성의 삶이 피폐해진다. 루이 14세는 위그노를 박해하고 죽이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결국 톨레랑스의 상실은 결국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가 되었다.

루이 14세의 증손자인 루이 16세는 조상들의 쌓아놓은 죄악의 과오를 짊어지고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루이 16세는 1787117베르사유 칙령이다. 이 칙령을 톨레랑스 칙령이라고도 부른다. 이 칙령의 발표로 프랑스에서는 실제적으로 관용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톨레랑스가 법이 되고 사회의 보편적 가치가 되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고 아픔을 겪었다.

다인종, 다문화, 다민족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필요한 사회적 가치는 톨레랑스의 정신이다.

위제 알라드의 ‘성경의 무게’(1562년). 성경의 무게는 교황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기록한 책의 권위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장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뒤쪽에 서 있다.
위제 알라드의 ‘성경의 무게’(1562년). 성경의 무게는 교황을 비롯한 모든 인간이 기록한 책의 권위보다 더 무겁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장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이 성경 뒤쪽에 서 있다.

'5개 솔라(Sola)를 기억하라'

종교개혁은 초대교회로 돌아가려는 운동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개혁을 위한 5가지 원리와 기둥은 오직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다. 루터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오직 예수그리스도'를 강조했고, 칼뱅은 여기에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더했다. 성경은 종교개혁의 원자료이다. 성경이외의 모든 것은 보조 자료에 불과하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것인가? 우리는 늘 동일한 질문을 반복한다. 왜 질문을 반복할까? 제자의 삶을 배우지 못해서 그럴까? 아니다. 우리의 성경에 대한 앎은 포화상태이다. 단지 내려놓기 실을 뿐이다. 내려놓고 십자가의 길을 당당하게 걷는 그 길을 피하고 싶은것이다. 좁은 길을 걷고 싶지 않은 것이다. 즐기고 누리고 적당하게 우아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나의 욕구와 욕망을 채우는 그 길을 포기하라, 그리고 위그노들이 걸어갔던 십자가의 길에 자신의 전부를 과감하게 던져보라. 그러면 신앙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