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에 따른 설교] 문영철목사,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영웅이 된 소경"

  • 입력 2021.10.19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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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도 성령강림절 스물세 번째 주간

1.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영웅이 된 소경(막 10:46-52)


  일찍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르침을 받아 제자가 된 자들은 예루살렘 길에 오른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이 영적으로 감겼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오른 후에 예수님이 영광의 자리에 등극할 때에 좌우편의 자리를 자기들에게 달라는 두 제자를 놓고서 다른 10제자들이 분노를 터트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세 차례나 수난 예고를 하셨고 세 번째 수난예고 직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곁에서 훈련받은 상당한 지위를 얻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주류사회의 멤버의 지위를 획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류도 아니요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던 비주류의 인물이 예수님을 이해하고 제대로 알아보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가 소경 바디매오입니다. 바디매오는 별 볼일 없는 사람(nothing)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의 외침을 무시할 정도로 무가치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는 어떤 창피함이나 자존심을 주장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매오는 어떠한 제재나 말림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로지 예수님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자유로이 예수님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미 내어 놓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으로 부터는 응답을 받기 위해 힘을 다하여 외쳤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다윗의 자손 메시야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앞을 볼 수 없는 처지에 있어도 주변의 사람들이 말하는 이야기는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앉아 있는 갓길 가까이에 그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지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일생에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는 겉옷을 벗어던지고 예수님께 달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도록 경계선을 쳐 놓은 사회적 통제의 벽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이 들을 수 있을 만큼 소리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47-48).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말리면 말릴수록 그는 더욱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별 볼 일없는 소경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그가 믿었던 메시야가 주는 기적을 경험할 것 같습니까? 주변에서 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경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도 믿음의 확신으로 다윗의 자손 메시야를 믿는 소경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길 가시던 예수님이 가던 길을 멈추어 섰습니다. 소경의 외침을 들으신 것입니다. 소경을 불러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소경에게 늘 하시던 방식대로 물었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는가?” 이 소경은 부와 명예와 권세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제가 보기를 원합니다”고 하였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선언하십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소경의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의 눈이 열려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가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소경은 별 볼 일없는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2. 새 언약의 제사(히 7:23-27)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옛 언약제도와 새 언약 제도가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독자들에게는 옛 언약 제도와 새 언약 제도는 대단한 관심거리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제사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으로 섬기는 그들에게는 삶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유대인 독자들입니다. 그들은 조상 적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DNA를 물러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이  복 주시는 이심에는 한 치의 변경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역시 그렇습니다.

 새 언약을 만나기 전에는 그들은 율법대로 하나님을 섬겼으며 율법대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새 언약의 제사의 방법을 만나고 난 이후로는 그들은 삶에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변화는 자유가 있으면서도 참된 경건생활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으면 제사장 앞으로 제물을 가지고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 또한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은 많이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도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제사는 무엇이 다른가? 죽지 않고 영원토록 존재하는 제사장 앞에 제물을 준비하지 않고도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단번에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언약의 제사에서 그리스도는 연약한 우리들에게 항상 도움 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대가를 지불한 대속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27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제사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완전히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항상 살아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25절). 

 

3.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 본 다윗(시 34:1-8)


  본 시편의 표제어는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에 관한 시, 그가 아비멜렉 앞에서 행동을 변경했을 때; 그리고 아비멜렉이 그를 쫓아내었고 그리고 그가 떠났다(A Psalm of David, when he changed his behaviour before Abimelech; who drove him away, and he departed)”. 여기서 KJV의 행동(behavior)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타엠(טַעַם)”의 문자적 의미는 “맛(taste)”입니다. 

표제어에서 다윗이 자신의 맛을 바꾸었습니다. 8절에서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고 합니다.  다윗이 왜 맛을 바꾸었나요? 다윗이 맛을 바꾸게 된 것은 하나님의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용광로에서 나오게 되니 다윗이 단련된 후에 나온 정금처럼 변한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왕의 추적으로 받아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이방 땅 블레셋 가드지방으로 피하였습니다. 다윗이 살기 위해서 이방 땅으로까지 가서 가드 왕 아비멜렉(아기스)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 왕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한 다윗이 적장 앞에 포로의 몸이 된 것입니다. 이제 다윗의 생명은 적장의 입술에 떨어지는 말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맛을 변경시켰습니다. 이제 다윗은 예전에 만만을 무찌르던 용감한 장수 다윗이 아닙니다. 다윗은 맛이 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침을 흘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행세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가드왕의 눈에 다윗은 더 이상 장수가 아니라 미치광이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왕은 신하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미치광이로 취급하여 쫓아 보내었고 다윗은 죽음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이렇게 바뀔 수 있는가? 적장 골리앗을 무찌르고 온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다윗이 어떻게 침흘리는 미치광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는가? 그러나 겉보기에는 침을 흘리는 미치광이처럼 보였을지 몰라도 다윗은 그 중심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기도하는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프로그램 속에서 다윗은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였습니다. 마치 용광로에서 이제 막 나온 정금처럼 되었습니다. 다윗은 고난 속에서 중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다윗에게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4, 6절)”.  

뿐만 아니라 다윗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하나님의 구원의 복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다윗의 인생의 맛을 변경시킨 것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4. 모든 것을 공급하신 창조자(욥 42:1-10)

 

 우리들이 살아가는 중에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는 우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당혹스럽습니다. 욥은 당시 그 지역에서 부자로 소문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에 욥이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에게 갑자기 큰 재난이 닥친 것입니다. 감자기 폭풍에 집이 무너져 그 안에서 생일파티를 하던 자녀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동시에 종들에게서 전달된 내용은 들판에서 풀을 뜯던 가축떼를 도적이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욥은 온 몸에 종기가 생겨서 기왓조각으로 헌데를 긁고 있었습니다. 

이 때에 욥을 가장 힘들게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그 아내였습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다음에는 가장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이었습니다. 아마도 평소에 경제적으로 욥의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었던 친구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친구들이 욥에게 찾아와서 훈계하고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이유없이 어려움을 주셨겠는가? 죄를 멀리하라”는 말로 욥을 가르쳤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숱한 변론의 과정을 거친 후에 욥이 하나님 앞에 입을 열고 있는 장면입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지난날 안다고 믿었던 하나님을 이제 생각해 보니 잘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위 완전하고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욥이 어떻게 하나님을 몰랐다고 할 수있는가? 고난을 통과하기 전에는 생각으로 머리로 알고 있던 하나님을 욥이 고난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깨달아 아는 순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친밀한 경험적 관계에 들어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욥이 자신의 비참한 지경에 이르는 자리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생명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모든 물질 활동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하나님이 공급해 주신 덕분인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평소에 내 것으로 여기던 당연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주신 것임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5 대속적 죽음으로 얻은 구원(막 10:35-45)

K-Pop 방탄소년단 BTS의 공연에 미국과 유럽의 청소년 팬들이 열광하고 있습니다. 
9월에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했습니다. 7주 연속으로 그 차트에서 자리를 지켰다고 했습니다. 영국에서 네델란드에서 독일에서 프랑스에서 팬들이 방탄 소년단의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있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팝이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서구의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방탄 소년단이 부른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가사에서 자신과 영혼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희망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 서구 청소년들이 자신을 사랑할 필요를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존중하는 법도 사랑하는 법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되었을까? “어쩌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솔직히 인정할 건 인정하자 니가 내린 잣대들은 너에게 더 엄격하단 걸 니 삶 속의 굵은 나이테 그 또한 너의 일부 너이기에 이제는 나 자신을 용서하자 버리기엔 우리 인생은 길어 미로 속에선 날 믿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은 오는 거야”. 자신에 대한 엄격한 잣대로 인해서 자신을 용납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관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어렵고 힘든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올 것을 믿고 있습니다.  기존 사회의 억압과 편견의 틀 속에서 자유와 능력을 펼치지 못한 서구의 젊은이들이 자신을 사랑하라는 노래가사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억압과 편견의 틀 속에서 해방의 경험을 맛보지 못한 영혼들을 자유케 하려고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던지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제자들은 원수를 패배시키고 승리하겠다는 결의에 차서 그분의 좌우편에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툼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굳는 결의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결의가 제자들의 결의가 다른 이유가 무엇인가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적을 무찌르고 승리한 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고난을 받아 죽게 될 것이라는 예고를 세 차례나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올라가는 동안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분명히 들었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대비와 각오를 하지 않았을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윗과 같은 왕으로 등극할 것을 믿었고 다윗같은 메시야가 로마황제를 능히 무찌르고 왕으로 등극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의 수난예고를 제자들에게 하였고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했던 예수님은 제자들과 완전 다른 방향에서 예루살렘을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서 약속한 고난의 종의 임무를 완수하기 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대속적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예수님의 주 임무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완수할 대속적 사명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운명까지 영혼과 몸을 온전히 맡김으로써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세상의 통치자와 전혀 다른 왕의 모델로서 길을 가셨습니다. 그 모델은 세상에서 섬김받고 권세를 누리는 자가 제왕적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도리어 백성들을 섬기려고 하고 목숨까지도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는 영적 메시야의 모델이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이란 전당잡힌 물건을 찾기 위해 지불하는 값을 말합니다. 허물과 죄로 사로잡힌 영혼을 되찾기 위해 예수님께서 손수 몸을 던저 그 죄값을 지불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하자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의 영혼이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참 자유와 구원을 얻게 된 것이 대속적인 제물이 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피하지 않고 완주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영혼이 감사와 감격으로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게 될 때에 상하 수직적  갑을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 친구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는 제자들을 포함한 모든 믿는 신자들은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이 참여는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동시 예수님과 함께 고난의 자리까지도 가는 친구관계가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영광을 맛볼 수 있는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내 영혼을 되찾아 주신 예수님이 우리의 찬양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명령만 내리는 한 번의 퍼포먼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고 되찾아 주시기 위해 자신의 몸을 대속물로 버리신 예수님께 감사와 믿음의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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