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청소년 시기에는 전체를 집약하여 보기 어렵다. 그러나 25세부터는 중심부에서 전체를 보려고 눈을 크게 떠야 한다. 그래야 구석도 보인다. 구석에서 보면 중심도 전체도 멀어 보인다. 자기가 있는 구석도 잘 안 보인다. 교만한 자들은 변두리에서 싸우기를 좋아한다. 구석지에서 상대를 몇 번 방어하면 그것을 이긴 것으로 착각한다. 구석에서 이긴 것 가지고 승리를 자축하지 마라. 좁은 공간인 구석에 몇 사람이나 모일 수 있겠는가? 새로운 친구가 끼어들 자리가 있을까?
∙ 진보가 교만하면 싸움꾼이 되고,
∙ 보수가 교만하면 고집꾼이 된다.
∙ 진보가 온유하면 개척자가 되고,
∙ 보수가 온유하면 지휘자가 된다.
눈이 교만하면 방향을 찾지 못한다. 눈은 왜 중요한가? 눈은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를 결정짓는 ‘관계의 틀’이기 때문이다.
네모로 보느냐? 둥그렇게 보느냐? 뾰족하게 보느냐? 끌어당길 대상으로 보느냐? 밀어낼 대상으로 보느냐? 사랑의 대상으로 보느냐? 가르침의 대상으로 보느냐?
사울 왕은 소년 다윗을 제거할 대상으로 본 거지요. 블레셋 나라 제1의 장군 골리앗 앞에 이스라엘 전군이 떨고 있을 때, 사울 왕 자신도 숨죽여 있을 때 누가 등장 하였던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승리를 거둔 다윗! 그 다윗의 이름 앞에 사울 왕은 축복 대신 시기와 질투, 교만의 칼을 선택합니다.
여러분은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지내왔는지요? 이웃들이 기뻐할 때, 기쁨과 축복을 함께 나눈 적이 있었는가요? 없었다면 교만의 길을 걸었던 악마의 지배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친구가, 이웃이, 사회가, 국가가, 지구촌이 슬픔에 빠져 울고 있을 때 여러분은 그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울어 보았는지요?
울지 않았다면 교만한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교만한 자는 울지 않는다. 친구가 고민에 빠졌을 때 형제가, 동서가, 선배가, 후배가 외로워 힘 빠져 있을 때 위로해 주고 있는가? 함께 놀아준 적은 없었던가? 말동무가 되어 주어라. 교만한 자는 놀아주지 않는다. 교만한 자는 공감을 만들지 못한다. ‘지도자는 지적하는 자가 아니라 꿈을 키워주는 자다.’
∙ 놀이터와 전쟁터
두 분 선생님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수업시간이 되어 교실에 들어가면서 김 선생님이 말씀 하십니다. “아~ 이제 또 전투가 시작 되구나. 저는 전쟁터로 갑니다. 요즘 아이들 정말 말 안 듣습니다”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 끌면서 교실을 향합니다.
옆에 계셨던 오 선생님이 말씀 하십니다. “야호~ 수업은 놀이야. 나는 놀이터가 제일 좋아 요즘 아이들은 못하는 게 없어, 멋진 아그들이야” 교실을 놀이터로 관계 짓는 선생님이 바로 온유한 선생님입니다. 온유는 겸손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