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경험은 건강한 자존감 형성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제프리 영 박사(Jeffrey E. Young)는 인간은 기본적으로 다섯 가지 핵심적인 정서적 욕구가 있다고 했다.
첫 번째는 ‘타인과의 안정애착’, 두 번째는 ‘자율성에 대한 욕구’, 세 번째는 ‘타당한 욕구와 감정을 표현하는 자유’, 네 번째는 ‘자발성에 대한 욕구’, 다섯 번째는 ‘현실적 한계 및 자기 통제에 대한 욕구’다.
이런 기본적인 욕구는 어릴 때 성장해왔던 환경과 부모님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경험되어야 하며, 욕구 충족이 좌절될수록 세상을 살아가는 부정적인 방식들이 만들어진다고 했다. 그 부정적인 삶의 방식을 가리켜서 ‘초기 부적응 도식’이라고 했다.
제프리 영 박사는 ‘나를 새롭게 하는 열쇠’라는 저서에서 긍정적인 적응적 도식도 있지만, 나를 스스로 힘들게 하는 부적응 도식을 ‘인생의 덫’이라고 했다.
인생의 덧은 어린 시절에 이미 형성되어 있으며 그 방식들은 반복되는 패턴을 갖고 있다. 과거 우리는 버림받거나 비난받거나 과보호받았을 수 있으며, 학대받거나 따돌림당하는 등 정신적으로 다양한 손상을 받을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인생의 덫은 우리들 자신의 일부가 되어 일생을 조종하게 된다. 어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학대받고 무시당하거나 책망받고 조종당했던 상황을 다시 한번 자초하게 되고 원하는 것과는 반대의 상황을 만들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은 이런 ‘인생의 덫’ 즉, ‘부적응적 도식’에 대해서 객관적인 문제를 갖고 생각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부족하다.
어릴 때 아버지와 언제나 함께 있고 싶어 했던 여성이 있었다. 아버지 직업상 일주일에 한 번 집에 들어오셨지만, 그때마다 아버지는 “우리 딸 잘 지냈어?” 라기보다는 “일주일 전에 아빠가 하라고 했던 숙제 했어?”를 먼저 물어보시는 분이셨다. 어릴 적 그때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너무 미웠고, 때로는 아버지가 냉정하게 보였다. 그런 아빠와 있을 때마다 언제나 정서적으로 버림받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남편도 아버지와 비슷하게 냉정하다. 이상하게 자신은 차갑게 보이는 남자들에게 마음이 끌렸었다. 그런 남자들이 이성적으로는 싫었지만 정서적으로는 자꾸 거부할 수 없었다. 남편에게 언제나 하고 싶었던 말은 “여보 나 좀 봐줘.”, “여보 나를 좀 따뜻하게 안아주세요.”였다. 그런데 이 말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듣고 싶고 말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목소리는 예수님께 듣고 싶었던 목소리이기도 하다. 바로 그때의 상황에 예수님을 초대해서 예수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표현해보라고 했다. “예수님 사랑한다고 말씀해주세요.” “예수님 나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예수님 언제나 함께 해주세요.”
예수님께 듣고 싶고 말하고 싶었던 그 말은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에게 동일했다. 그것이 도식이라고 한다. 정서적인 버림을 경험한 사람은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 최선을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으면 또다시 버림받는 경험을 하면서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적개심과 같은 감정들이 마음에 쌓이게 된다. 도식은 반복된 행동 패턴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래서 반복된 행동 패턴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서 많은 돌봄을 받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물론 인생의 덫이란 것이 한 번에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쉽게 변하지 않을 뿐이지 인내심을 갖고 말씀과 기도로 나의 인생의 덫 즉, ‘도식’을 알아가는 영성 과정을 거치면 사람은 변한다.
그동안 상담현장과 목회 현장에서 만나왔던 사람들은 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스스로 자신이 성장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을 만나오고 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내가 마음을 열고 주님의 음성과 교제를 멈추지 않으면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계 3:20)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잡혀 있는 도식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기가 어렵다. 내가 문을 여는 만큼 주님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혼자 힘으로는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나의 아픔을 보는 것이 두려울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분의 손을 잡고는 가능하다. 주님의 손을 잡는 것부터 새로움의 출발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