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숭실학원과 교회연합운동을 이끈 베어드 선교사

  • 입력 2022.08.25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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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76)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88)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하나님이여 사슴(케아얄)이 시냇물(아피케 마임)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타아로그) 갈급하나이다”(42:1).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시편 기자는 노래한다. 우리 인생과 국가의 존망(存亡)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시편 42-43편에서 알 수 있다. 요즘 일어나는 세상일은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상태로 미로(迷路)에 빠져가는 듯한 느낌이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지 않을 수 없다. 시편 42편은 축제 때 성전에 가는 시편, 공동체 국가 회중 탄식 시편으로서 하나님의 보호를 보여주는 보호적 시편(Protective Psalm)이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예배 시편으로 국가적 탄식 시편(89, 46, 51)으로 역사적 정치적 상황에서 요단땅, 헐몬산(헤르몬)과 미살산의 지역에서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본다(42:6). 시편 42-43편은 한 짝으로서 전쟁시에 제의 행위를 보여주며 희생제사를 드리는 시편으로 보인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42:2).

이 시편 42편은 시편 다섯 권 중에 제2권을 시작하는 시편으로서 표제어가 고라자손의 마스길(교훈을 위하여),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이다. 시편 중에 고라자손들의 시는 10(42, 44-49, 84-85, 87)로서 예배의 찬양을 맡았던 제사장들이었다. 이 시편은 마음이 낙심하고 절망 중에 있을 때 자기정화(카타르시스)를 할 수 있는 미려(美麗)한 시로서 영혼의 안식을 누리도록 인도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마 티쉬로하히)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나흐쉬 와 테헤미)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아라이 호히리 레로힘)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키 오드 오데누)”(5). 세상과 이웃, 대적자들과 대적적인 민족과 국가의 위협은 너무도 크고 위협적이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테홈 엘 테홈)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미쉬바레이카 웨갈레이카) 나를 휩쓸었나이다”(7). “내 반석이신(사레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마 쉐카흐타니)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베라하츠 오에브)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9). 적의 공격과 위협은 너무도 심하고 절망적인 것을 본다.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베레차아흐 베아체모타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헤르푸니)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아에 엘로헤이카) 하도다”(10).

이 시편은 하나님을 찾는 모든 신앙인들이 즐겨 읽으며 위로를 받게 되는 가장 고난 속에 위로를 받는 시편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알라이 호히리 레로힘)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키 오드 오레누)”(11). 깊은 탄식의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이 있다. 심한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비전을 보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 했던 선교사들이 바로 소망자들이다. 그들은 바로 여전히 찬송하는 사람이다. “그런즉 내가 하나님의 제단에(미즈바흐) 나아가 나의 큰 기쁨(심하트 길리)의 하나님께 이르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수금으로(베키노르) 주를 찬양하리이다”(43:4).

윌리엄 마튼 베어드(1862-1931)는 평양에 숭실고교와 숭실대학교를 세운 설립자였다. 베어드는 부모와 가족들이 노예제를 반대하며 인디애나 주로 이주하였고, 베어드는 어머니 낸시 패리스 베어드에게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윌리암 베어드는 형 존 베어드가 마련한 학비로 하노버 대학교와 맥코믹 신학교를 다녔다. 베어드는 선교사로 나가고 싶었지만 노잣돈이 없어서 콜로라도에서 목회를 하다가 델 노르트 대학의 학장을 맡는다. 그러다가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이자 타자기 회사 사장인 존 언더우드의 선교사 월급 제공 소식을 듣는다. 장신대와 숭의여고의 설립자 새무엘 마펫이 베어드에게 편지를 보냈고 베어드는 학장직을 그만두고 하노버 대학의 동기였던 애니와 결혼하고 선교사로 한국땅에 발을 내디뎠다.

베어드 선교사와 그의 아내 애니 베어드선교사, '멀리멀리 갔더니' 찬송가
베어드 선교사와 그의 아내 애니 베어드선교사, '멀리멀리 갔더니' 찬송가

베어드는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고 첫 선교지로 부산으로 정해져 한국을 배우며 부산에서 선교 활동을 한다. 그는 하디 선교사의 집에서 보내면서 허드 영국 영사의 도움으로 선교부 건물을 구입한다. 그는 순회 전도여행과 사랑방 서당, 기독교 서적 번역, 대구 선교부 설립, 초량 교회 설립 등을 하며 활발히 선교를 하다가 선교부 교육 고문이 되어 서울로 이주한다. 그는 장로교 선교 정책을 입안하고 1897년 평양으로 파송되어 급격하게 확대되는 전도와 교육으로 확대되자 중등 교육반을 운영한다. 이것이 바로 숭실학당의 시작이 되었고, 스왈렌 선교사의 기부금으로 학교를 세운다. 또 그는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교파 연합(장감)으로 1906년 합성숭실대학을 설립한다. 그는 숭실대학 교장을 맡고 기독교서회 편집위원, 성서공회, 성서출판 위원을 역임한다. 그의 활발한 활동 중에 1931년 장티푸스에 걸려 69세에 나이로 평양에서 별세한다. 그는 독립 운동가를 배출하는 일을 하였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마펫, 스왈렌, 맥큔 선교사와 더불어 일본 총독부의 감시대상 인물이었다. 베어드 부인 애니 아담스는 베어드의 사역을 도우며 찬송을 작사 작곡하였던 노래는 우리 마음속에 지금도 남아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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