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잘린 밑동에서 새싹을 틔우시는 하나님의 리셋, 김광현 선교사

  • 입력 2022.11.11 12:28
  • 수정 2022.11.11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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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한 그날 밤 “잘 왔다” 안아주시던 그 품이 리셋의 시작

김광현 선교사
김광현 선교사

진흙밭에서 아름다운 장미꽃을 피운 리셋된 삶을 읽어본다. 리셋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찬양사역자, 방송 찬양의 DJ 등으로 활동하던 김광현 형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일본 선교사로 보냄을 받는다.

우리는 날마다 리셋된다는 것은 초기화, 처음 모습 그대로로 변해가는 것으로 그것은 태초부터 계획하신 인간이란 피조물이 천국에서 성화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 딸들로 살아가는 모습으로 리셋되어 가는 과정을 경험하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본명 김광현이 아닌 리셋으로 찬양사역자로서 활동하게 하셨다. 나는 1978625일이라는 다소 특이한 날 태어났다.

5살 이전 시절을 기억하기란 쉽지는 않다. 참 많은 것들이 뒤죽박죽이지만 기억나는 것들을 몇 가지의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나에게는 엄마가 없다. 나의 아버지는 무지 무섭다. 나의 형도 무지 무섭다. 친구를 사귈 수 없다. 눈치를 봐야 살 수 있다. 새마을 유치원을 다니는 시절 단 하나의 장면이 떠오른다. 아빠와 알지 못하는 여자와 나. 이렇게 3명이 딸기농원에 들어갔다. 무엇이 못마땅했는지 나는 딸기가 나오자마자 손으로 딸기를 으깨기 시작한다. 이 장면을 보면 정말 말썽꾸러기의 장난 같을 수 있겠지만 당시의 남아있는 감정은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 아버지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눈치채서일까?

참으로 그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다. 30대가 돼서야 만나게 된 친어머니의 말로는 3살 때 어머니가 홀로 하는 가게에서 우리 엄마 힘들게 하지 마!”라며 손님들을 쫓아내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로 보냈다는 기억은 없지만 미루어보아 당시의 행동이 이해되는 것 같다.

문화영화, 극장 CF 등을 만드는 영화감독을 직업으로 삼은 아버지는 당시 잦은 출장과 음주가무, 도박을 즐겨하시는 분이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남의 집들에 맡겨져 지냈다. 매일 술을 드시고 담배연기가 가득한 곳에서 화투를 치시는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눈치를 보며 사는 것.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적절히 분위기에 맞춰 행동한다. 그렇게 스파이처럼 조심스레 섞여 있는 듯 한 감정으로 지내던 중 집을 나간 형이 갑자기 나타나 화를 내며 방에 나를 가둔 후 가죽 허리띠로 밤새 때린 적도 있다.

그 이유를 나이가 들어 듣게 되었는데 나의 존재가 형에게는 돌봐야 하는 대상이며 본인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그로 인해 학교도 가지 못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에 대한 미움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그런 돌발적인 행동을 했었다고 했다. 어느 누구도 내 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딸기 사건 이후에도 많은 여자들이 저희 집을 오갔다. 이 부분에서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오해를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아버지의 명예 부분이기 때문인데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은 남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 게다가 문제아처럼 여겨졌던 형까지 케어하기는 실로 어렵기에 가정에 반드시 엄마라는 존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12(이 숫자는 30대 때 다시 만난 형이 언급한 숫자이고) 나의 남아있는 기억으로는 6명 정도의 어머니가 존재한 것이기에 독자들의 이해를 부탁드린다.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처음 존재하는 시기는 신기하다. 새마을 유치원을 다니는 시절 친구 호석이가 엄마와 목욕탕에 가던 모습에 나의 어머니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의 대답은 엄마는 죽었다. 이름, 나이, 얼굴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였다. 참으로 재밌게도 집안에 있는 앨범의 사진들 중에는 오려진 혼자 있는 사진이 제법 남아있었다.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나는 스스로 하늘의 별, , , 때로는 꽃, 담벼락을 보며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빌기 시작했다. 이것만 보아도 사람은 신을 찾고자 하는, 의지하고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부터 집에 어머니라고 불리는 분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상황이 발생했으나, 안타깝게도 상상했던 어머니의 사랑은 받진 못했다. 잦은 폭력과 협박을 견뎌야 했으며 한 어머니는 화가 났다는 이유로 30센티 플라스틱 자의 모서리로 정수리 부분을 찍어 피가 흐르기도 했다.

폭력을 행사한 어머니도 놀랐는지 찬물로 씻고 휴지로 막고 있으라 하며 출장 간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 스스로 넘어져 생긴 상처라고 말하라고 했다. 여자아이를 데려온 또 다른 한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편애했는지 나의 장난감을 뺏으려 하다 실패해 울고 있는 딸을 옹호하며 긴 시간 발길질과 따귀로 폭력을 행사한 뒤 바로 전축 앞에 앉히고 헤드셋을 끼우며 웃으라 명했고 일회용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뒤 출장 다녀온 아버지에게 아들과 재밌게 지낸다고 말하며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설거지, 방청소 등의 집안일을 하는 등의 신데렐라와도 같은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있다. 반면 기억나지 않는 사건도 있다. 조폭인 형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가출을 했다가 맘 잡고 다시 돌아온 날 어떤 어머니가 내 머리를 잡고 세수 대야에 넣어다 뺏다를 반복하며 고통을 주자 못 견디고 그 어머니를 발로 찬 뒤 아버지에게 혼날까 두려워 다시 가출했다고 한다.

어떤 어머니는 김치에 아세톤을 넣어 나에게 먹이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김광현이란 인물이 참으로 여리고 착한 피해자인 것 같지만 그 환경에서 보고 배운 폭력성과 허풍과 거짓말, 살아남기 위해 터득한 눈치, 도벽들이 다른 곳에서 발화되는 문제 투성이 아이였다.

이런 어른들의 폭력은 어른에 대한 혐오로 발전해갔으며. 특별히 여자에 대한 미움은 청년이 된 후에도 상당했다. 기억나는 사건 중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여자아이의 고백에 따귀를 때린 내 모습을 지금도 기억해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소름이 끼친다.

훗날 성장 후 찾아본 초중고 졸업 사진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져 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긴 어둠의 세월을 살아간 사람이 웃음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 때문이다.

고등학교 1년 겨울. 문득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비관으로 어느 날 가출을 결심했다. 조폭으로 살던 형의 모습을 간간히 곁에서 경험해서인지 나는 형과는 다른 느낌으로 아름다운 가출을 하고 싶었다. 그 당시 PC방이 생길 무렵 그곳은 나에게 좋은 안식처를 제공해줬다.

그러나 그조차도 돈이 있어야 가능했기에 결국은 거리를 배회하며 적당한 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눈에 보이는 현수막이 있었으며 고등부 동계 금식수련회라고 쓰여 있었다. 금식이란 말을 무술의 이름으로 이해한 나는 곧바로 수련장으로 들어갔다. 아래서 보는 붉은 네온사인이 들어오는 십자가는 적십자라고 순간 착각했다.

그곳은 청주순복음교회였으며. 들어갔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단전호흡을 하고 있는 듯 빨간 방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이상한 말로 기도를 시작한다. 두려운 마음에 일어나려 했을 때 한 남자 어른이 나를 붙잡으며, “형제님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말을 건네주는데 그 당시의. 나의 행색은 온통 검은색으로 도배한 소위 건전해 보이지 않는 양아치의 모습이었고 집 나왔는데요!” 하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나를 덥석 앉고 눈물을 흘리며 잘 왔다라고 해주었다. 그분은 현재 부산의 순복음명륜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최성구 목사님이시다.

목사님은 그날 지금은 선교사이자 신학교수로 활동하는 강임석이란 친구를 소개해주셨다. 그 친구는 나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전을 준 친구이다. 그때의 수련회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 사역자, 목회자가 되어 있으며, 그들의 고백은 다들 한결같이 하나님을 만나면 행복해진다였다.

그렇게 나는 의도치 않은 금식 수련회를 하게 되었다. 당시 담당 교사였던 유병순 권사님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유창한 기도도 아니고 그저 만나고 싶다고 고백하듯 기도하는 것이라 하며 말씀을 읽어주셨다. “나를 전심으로 찾고 찾으면 만나주리라.” 양아치였던 김광현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하나님을 만났을 때 성령님은 지나온 시절의 장면을 영화 필름처럼 보여주셨다. 그것은 나의 아픔을 어루만지기 위함이 아닌 내가 얼마나 비뚤어진 마음으로 살아온 아이 었다는 것을 보여주시며 눈물로 회개하게 하시고자 한 사건이었다.

지면에 다 담지 못하지만 많은 에피소드와 부끄러운 실수들도 가득하다. 그러나 그 당시 모두가 나를 참아주고 기다려준 것 같다는 생각에 때때로 기억하며 맘속으로 감사하게 된다. 나에게 훈계를 해주셨던 정법영 선생님(지금은 목사님)께도 내 성질에 참지 못해 멱살을 잡는 실수도 범했다.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주변 분들이 얼마나 참아주셨던 걸까? 이 글을 쓰며 감사함과 죄송한 마음이 가득해진다. 한 번에 변하지 않는 양아치의 삶은 서서히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리셋되어 갔다.

학창 시절 가나안 선교단(찬양선교단체)에서 찬양의 도전을 받아서일까?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찬양사역자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나는 일종의 뮤지컬 배우로 착각해서 다른 학과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인도하심 속에 한세대학교 신학부에 들어가게 하셨다.

하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다. 그 당시 이것이 다시 뜨거운 믿음을 갖게 한 원동력 중에 하나가 되었으나 나의 삶이 나아지고, 모든 것들이 행복해지는 것을 꿈꿔왔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여전히 가정은 경제적인 어려움, 살아온 인생 속에 굳어진 말과 행동들. 무엇하나 행복을 주지 못하고 불안함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믿음도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환경 가운데, 과정 가운데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아무 공로 없고 오직 은혜라는 사실이다.

군대를 가고 혼자 예수를 믿는 신앙을 선임들의 비난 속에서 불교인 대대장님의 배려로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학기를 마치고 강화도 쪽의 작은 개척교회에 들어가 숙식을 하며 말씀을 읽고 전도를 하며 아울러 설교와 찬양을 했다. ‘하나님은 나를 CCM 가수로 사용하실 것이라고 하셨는데 왜 나의 삶은 전혀 그것과 상관이 없는 삶일까?’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브니엘교회의 목사님은 일산에 있는 예수가족교회에 들어갈 것을 권유해주셨다.

그곳에 들어가고자 하는 분들은 해외 유학파에, 상당한 지식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세울 것도 없는 내가 51명 중에 홀로 뽑히게 되었다. 당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한편 그렇게 엉터리 사역자가 있었을까 하는 죄송한 마음이 든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을 율법적으로 외치면서 스스로는 실천하지 못하는 그런 사역자의 모습을 보면 말이다. 이 점을 하나님은 찬양사역자로 부르는 순간에 깨닫게 하셨으며. 긴 시간 동안 교회 사역자로 모든 부서들에서 다양한 경험하게 하시고 소중한 것들을 깨닫게 하신 후 10년이 지나서야 찬양사역자로 부르시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태초부터 계획하신 대로 성취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도원에서 찬양사역자로 부름을 받고 기도할 그때 생각지도 못한 친어머니에 대한 미움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시작이었다. 그때의 기도는 어머니가 나를 버린 것에 대한 용서의 부분이 아닌 날마다 어머니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죽여왔던 회개의 기도였다.

30대를 넘어서 찬양사역자로 1집을 발표 후 하나님은 친어머니를 만나게 하셨다.

첫 만남 때 사주팔자책을 읽어주었던 어머니는 나를 만난 후 성경책을 읽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으로 주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에서 찬양을 하신다. 나는 찬양사역을 하며 내세울 것도 없고 인맥이 많거나 훌륭한 인품을 가지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돕는 손길을 보내주시고, 필요한 자리로 부름을 받아 가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셨다.

첫 시작은 극동방송을 시작하여 여러 방송의 진행 및 프로듀서를 겸하게 되었고, 이후 여러 간증 프로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여러 추억 중 네 가지를 꼽는다면 인도 김재옥, 노미화 선교사님의 부름으로 사이바바홀리파이어학교에서 신년에 찬양콘서트로 하나님을 전한 사건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세계 선교에 찬양을 통해 쓰임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만이 가능하신 사건이다. 다음으로는 여러 다양한 전문인들(연주자, 가수, 연예인 등)로 구성된 엘라인을 만들어 사역을 하게 하셨으며, 그다음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믿는 카렌이란 민족(현재 난민으로 인정받아 태국 국경에 캠프를 만들어 지내고 있음)을 만난 일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역사하고 계심을 보게 하셨다.

마지막으로는 코로나 기간인 3년을 신학공부와 함께 목사 안수를 받도록 도전하게 해 주신 최선규 집사님과 정애리 권사님을 통해 세우신 마중물이란 기독교 연예인 모임 사역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이루시고 성취하시며 역사한다. 이렇게 양아치에서 양치기의 삶을 살게 하실 거라는 것을 과거의 모습 속에서 그 누가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현재 CGN 방송을 통해 만나 결혼하게 된 아내와 나는 어린 시절 꿈꾸던 따사롭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가게 됐으며 매번 경제적인 사유 등으로 좌절되었던 신학공부 마무리를 코로나 기간 미국에 있는 Oikos University에서 석사과정으로 M.Div. 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다.

경제적인 제한으로 음악석사과정은 잠시 중단한 상태이지만 하나님의 시간표를 사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욕심이 아닌 흘러가는 대로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삶이라는 걸 이미 알기에 내 맘속에는 평안함이 있다.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일본 선교사로 파송됨과 동시에 목사가 되는 시점(2022.11.21.)에 와 있다.

과거의 아픔이 다른 사람을 이해해주고 또한 위로를 해줄 수 있다는 흔히 말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으나, 그보다는 나의 지나온 과거로 인하여 하나님은 나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고 직접 찾아와 주셨다. 그리고 믿음을 허락하셨으며 하나님이 나를 향한 계획을 비춰주시고 걸어가게 하셨다. 지금은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이끄심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내 노력과 내 능력으로 이루는 사역이라고 착각했던 순간들도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고 그 능력과 노력하게 하신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고백한다. 앞으로 일본 선교사로서, 찬양사역자로서 그 땅에서의 삶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며 성령의 바람에 의해 항해되는 것을 그려본다.

하나님은 다 잘린 나무의 밑동에서 새로운 싹이 나게 하신다. 리셋의 인생을 보면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읽을 수가 있다. 이제 불우한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아름다운 부인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가운데 안수를 받고 일본으로 향하는 선교사의 모습을 보면서 보잘것없는 인생을 아름답게 하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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