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조선의 갈릴리 남도를 예수 사랑으로 전염시킨 오웬 선교사

  • 입력 2024.04.18 07:42
  • 수정 2024.04.19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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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361)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73)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전 강서대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그리스도대 구약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전 강서대 총장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이즈케루 웨야수부 엘 아도나이 콜앞세 아레츠)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22:27-28).

총선 정국이 지났다. 선거 전까지는 뚜껑을 열어보아야 안다고 했지만, 결과는 야당이 대승을 하였다. 누가 민심을 얻고 천심을 얻어 다수당이 되느냐 하는 갈림길은 정해졌다. 이제 겸손히 국민의 뜻을 따라 정치인들은 잘 다스려야 하리라.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겸손한 마음에서부터 우리의 일상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가니 형통한 일이 펼쳐지리라 생각한다. 시편 22편은 개인 탄식시로서 주로 신약 성경의 예수의 부르짖음이 있다. 곧 십자가 위에서 외치던 소리,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다니(나의 주여 나의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 (22:1) 아람어로 외치던 소리가 오늘 우리들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그 누가 알아줄 것인가? 이 탄식의 외침은 종종 혼동스럽게 하고 시편의 큰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당성과 우주적 도래의 구절(22:22-31)로서 존재한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아사페라 쉼카)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웨구루 미멘누 콜 제라 이스라엘)”(22: 22, 23).

이 탄식시편의 다른 메아리침은 시편에서 나타난다. 예수가 조롱당하고 그의 머리를 흔드는 고통을 언급하는 표현이다(15:29; 27:39; 23: 35; 시편 22:7). 또 예수의 옷이 찢겨지고 로마 병정에 의해 제비뽑기에 던져지는 수모(15:24; 27:35; 23:34; 19:24; 시편 22:18)받고, 하나님이 그를 구원해달라는 요청(27:43; 22:8)을 받는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콜 로아이 알이구 리)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리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편 22:7-8). 이러한 수난받는 메시아 예언은 역사적인 이야기로서 암시하여 반영되고 있고 예수 수난의 이야기 기사로서 대표적으로 읽힐 수 있는지 논란의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메시아 수난의 기사로서 그 예언 담보성을 확보되어 시편 22편이 차지하고 있는 메시아,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독보성을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아사페르 콜 아쩨모타이)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22:17-18).

예수 십자가의 고난은 오늘을 살아가는 고난 받는 사람들의 모든 고난의 짐을 짊어지고 대신 지시었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 십자가 아래에서 보혈의 피와 고난을 대신 지신 대속의 사건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예수 구원의 사건은, 대속의 신성을 가진 구속(야사, 구원)의 동사로서 자주 사용하여 탄식시에서 신성의 명령형 형태로 사용된다(7:1; 22:21; 28:9).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호쉬에니 미피 아르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22:21). 여호와의 구원이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한 우주적 구원을 말하며 미래의 회개와 이방인의 구원을 암시한다(22:27-28). “세상의 모든 풍성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아케루 와이쉬타하우우 콜 디쉐네 에레츠) 진토속으로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섬길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의 공의를 태어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22:29-31). 이처럼 우주적 구원과 구속의 대대로, 이어지는 연속성을 말하여 결론을 맺는다.

이처럼 왕정시편으로서 이 탄식시는 우주적, 보편적 구세주, 왕이심을 드러낸다(3; 5-7; 9/10; 13; 17; 22; 26-28; 31; 38; 40; 55-57; 59; 61; 69-71; 94; 108; 139-141; 143). 시편 22편은 토라시편(19)을 중심으로 제왕시(18; 20, 21)와 대칭과 개인 탄식시(17; 22)와 신뢰시(16; 23) 그리고 마지막 찬양시(15; 24)로서 상호대칭을 이루며 중앙 집권 구조의 구도를 형성한다. 토라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시편 1권의 전반부 구성을 보여준다. 시편 22편은 왕의 의식적 굴욕, 겸비를 보여주는 제의학파(스칸다니비아, 이튼)의 의식적 전투에서 시편기자는 일종의 위험한 상태의 전쟁에서 왕이 적들이 외국인들에게서 의식적 고통을 이기고 결국 왕이 승리하는 모티브를 제공한다. 신년 축제 의식을 반영하는 시편이라고 본다(2; 18; 89; 101; 110; 118).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키 로 바자 웨로 쉬카츠 에누트 아니)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울부짖을 때에 들으셨도다”(22:24).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이르에 아도나이 할레루후 콜 제라 야아콥 카베두후 웨구루 미메누 콜 제라 이스라엘)”(22:23).

 

이러한 찬양을 삶으로 살아가며 숭고한 선교의 길을 간 분이 계시다. 오웬(Clement C. Owen, 1867-1909)선교사는 애양원을 세워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그는 18677월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나 힘든 시드니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또 그는 1896년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의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897년 의료 선교사로 파송 받아 1898115일 선교사로 한국의 목포항으로 들어온다. 그는 1897101일 목포항이 개항되어서 1898년 유진 벨 선교사와 함께 목포 선교, 호남 지방 선교를 같이하게 된다. 오웬 선교사는 유진 벨과 함께 목포 선교부를 개설하고 1899년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식 의료소인 목포 진료소를 세워 병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한다. 오웬은 그 다음해 12월 제중원에 올리버 에비슨 박사를 돕기 위해 미국 북장로회가 파송한 의료선교사 조지아나 휘팅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이 두 선교사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룸으로 의료 선교가 더욱 힘을 얻어 활발하게 복음이 전해진다.

오웬 선교사와 오웬 기념각 (광주시 양림동, 일제강점기의 건축물.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오웬 선교사와 오웬 기념각 (광주시 양림동, 일제강점기의 건축물.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목포 지역에 진료소를 통한 복음 전도가 활발해지면서 약봉지에 한글 성경 구절을 써서 전해지게 된다. 기독교 서적도 출판하게 되고 치유 사역의 소문이 나서 신의라 불리는 오웬은 모든 종류의 질병을 치료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된다. 의료 선교와 복음 선교의 양날개를 달고 빠르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1900년 가을에 오웬에게 세례를 받은 김윤수는 목포 경무청의 총순(현 경감)으로 일하던 관리로 주조장을 소유한 목포지역의 유력자였다. 그는 어머니 손에 난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의사인 오웬을 찾았다가 복음을 듣게 되면서 자신의 가정은 물론 어머니와 장모까지 교회로 인도하게 된다. 1902년 집사로 임명된 김윤수를 목포 교회당 건축공사 때 총감독이 되어 프레스톤 선교사가 도착했을 때는 어학 선생을 맡기도 하였다. 김윤수는 광주 선교부의 선교사들의 집을 지으며 1912년 광주북문안 교회 장로직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나중에 광주 선교 사역과 나환자 사역에 크게 기여한 최흥종 목사를 전도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최흥종 목사를 전도하는데

기여를 한 오웬 선교사

오웬 선교사는 광주, 해남, 완도, 보성, 나주, 고흥, 화순, 광양 지방을 돌아다니며 왕성하게 순회 복음 전도를 하며 강진, 순천, 여수, 구례에 이르는 전남 동부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래서 광주 송정리 교회(1901), 해남 선두교회(1902), 광주 양림교회(1904) 등 많은 교회를 세웠다. 그는 나중에 너무 과로해서 기후와 풍토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된다. 1909322일 오웬은 남쪽 도서 지방을 순회하다가 광주, 남평, 화순, 능주를 거쳐 1주일 만에 장흥에 도착하였은데 고열에 시달리다가 윌슨 의료 선교사의 도움으로 치료하지만 상태가 나빠져서 그만 43일 토요일 밤 1045분에 소천하게 된다. 그는 짧은 42세의 인생을 마감했지만 광주 양림산 언덕 선교사 묘원에 묻힌 최초의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오목사라 묘비에 불리며 23인의 선교사와 더불어 잠들어 있다. 부인 휘팅 여선교사는 딸 넷을 키우며 안식년에 미국으로 돌아갈 때 까지 한국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오웬 선교사는 포사이드 선교사와 더불어 나환자를 돌보며 애양원을 설립하여 광주시 봉선동의 최흥종 목사의 땅 천 평을 기증받아 나환자 수용소가 애양원이 되었고, 오늘은 여수에 터를 잡게 되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에 여기는 예수 사랑의 정신은 오웬에게도 있었다. 오목사의 조선 사랑은 너무 뜨겁게 사랑하여 42세 불꽃같은 인생의 모든 것을 불태워 사랑했던 것이다. 사랑이여 영원한 오목사의 사랑이여, 조선 갈릴리 남도는 그렇게 예수 사랑이 전염, 영원한 사랑의 바이러스는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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