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23),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로다”(행 2:32)

  • 입력 2025.06.05 05:51
  • 수정 2025.06.0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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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첫째, 핵심 키워드,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

오순절 성령충만을 경험한 베드로는 달라졌다. 과거의 비굴하고 나약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한 여종의 말앞에 두려워서 벌벌 떨며 자기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했던 못난 모습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 베드로의 언어는 달라졌다. 그의 설교 언어는 흔들림이 없고. 분명한 어조였고, 확실한 과녁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예수님의 생애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과 승천은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며, 구약예언의 성취임을 선포했다. 베드로는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선포한다. 부활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구원 계획의 절정임을 선포했다.

부활은 구약의 예언과 연결되어 있다.

“주는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시16:10). 다윗은 이미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고 있었다.

“그의 영혼을 속건제로 드리기에… 그는 자기 후손을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그의 지식으로 많은 의인이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리라.”(사53:10-11). 예수님의 죽음 이후 다시 살아날 것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이 역사하신 구원의 중심 사건이며, 인류의 죄와 사망을 이긴 하나님의 승리 선언이다.

둘째, 핵심 키워드,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로다” 

베드로는 “우리가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담대히 선포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승천을 직접 목격하고, 이제는 내가 증인이라 고백한다.

성경의 역사는 증인들의 고백의 무대로 채워져있다.

초대교회 7집사 중 한 분인 스데반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다 돌에 맞아 순교했다. 순교하는 그 순간을 역사가인 누가는 아주 세밀하게 설명하고 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60). 스데반 집사는 자신을 향해 저주하며 돌을 던져 죽이는 살인자들을 저주하지 않고 사랑의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이렇게 담대할 수 있을까? 이것이 가능할까? 죽음이란 고통이다. 죽음이란 곧 생명의 끝을 말한다. 나의 존재가 이땅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의 마지막이 너무도 아름답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시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57).

스데반이 죽음을 극복했던 것은 성령충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앞에서 하늘이 열렸다. 주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셨다. 이것을 기독교적 언어로 영안이 열렸다고 표현한다. 죽음의 순간에 주님을 만난 것이다. 주님을 만나면 더 이상 두려움, 공포, 염려의 상황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죽음을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었던 힘, 죽음이 저주가 아니라 삶의 완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이 땅 너머 저 하늘이, 죽음 너머 영생이, 죽음의 저주 너머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약한 인간이  죽음을 초월하는 강한 존재로 거듭났다.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보혜사 성령님이 답이다. 다른 언어로는 해석할 수 없다. 이 내 안에 성령 하나님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무한한 능력의 에너지가 나를 사로잡는다. 

베드로는 담대히 고백한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이 일에 증인이다. 증인이란 보았다는 것이다,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수식어가 더 이상 필요없다. 내 눈으로 보았고, 내가 만졌고, 내가 들었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다.

디트리히 본회퍼 (1906–1945, 독일)는 히틀러 독재에 반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lordship)을 증언했다. “예수님은 단지 교리나 사상이 아닌, 지금 살아계신 분”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순교했다. 처형 직전,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1902–1950, 한국)이 계신다. 두 아들이 공산군에 의해 순교당했을 때, 사랑으로 구명운동을 했고, 가해자를 양자로 삼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활 신앙의 능력으로 실천한 목사님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인간의 성정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믿어지고 성령충만을 받으면 세상것은 작게 보이고 하나님의 일은 크게 보인다. 손양원 목사는 아들의 죽음을 뛰어넘어 예수님의 부활을 삶으로 증언한 것이다.

베드로는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단지 과거 제자들만의 고백이 아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고백한다면 “이 일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증인은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말한다.

용서를 실천할 때,

사랑을 드러낼 때,

불의에 저항하고 진리를 따를 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할 때…

그 순간 우리는 부활의 증인이 된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로다.” 이 한 절은 기독교 역사와 신앙과 사명을 모두 담고 있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이 고백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수많은 신앙 선배들은 이 증언을 삶으로 살아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묻고 계신다. “너는 이 일의 증인인가?” 말로만 아니라, 삶으로.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매일의 일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진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분들의 모습이다.

예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다르다.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성령충만을 경험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백이 다르다. 삶의 가치와 지향점이 다르다. 인생의 목적이 오직 나의 주인 되신 주님을 높이고 영화롭게 하는것이고 모든 영광을 그분께 드린다. 나는 종이고 당신은 주인입니다. 나는 조연이고 당신은 주연입니다. 주되심을 철저히 고백하는 신앙인들은 내가 빛나지 않아도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빛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주님의 일에 작은 불씨가 된다는 것만으로 감사로 여깁니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12광주리비즈니스미션 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12광주리비즈니스미션 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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