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어쩌면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 보내는 것 같다. 앉아서 작업하다보면 아래뱃살 두둑, 다리가 자연스럽게 약해지는 것은 필수 코스다. 컴 작업을 할 때 높은 다이위에 마우스와 자판기를 두고 서서 한다.
천성이 잘 안 움직이는 습관이 자연스러운 친구가 되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에게 평안한 잠을 주시듯, 나에게 사시사철 일거리를 주셨다.
교회 바깥 청소, 수양관 관리. 와~~~~ 수양관 관리는 한 여름 더위와 힘겨루기 해야 한다. 뒤돌아서면 자리는 잡초, 생명력 하나 만큼 질기다. 너란 친구 한평생 함께 살아가는 동지며. 동시에 반드시 극복해야할 대상이다. 인간이 정한 정돈이란 테두리에서 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삶의 기쁨과 도움을 주는 소중한 친구며, 누군가에게는 지긋지긋한 악연이다. 꿈을 꾸며 시골살이 들어갔다가 나중에는 오만가지 인상을 쓰며 저주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쓸모없다고 보는 그 흔한 잡풀에 뛰어난 효능이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빛이며 가시덩쿨 같은 존재가 된다.
오늘은 편한 마음이 아니라 이름 없는 잡풀들이 점령하고 있는 수양관으로 내려왔다. 나를 기다릴 풀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근거린다. 머리 지근거리고 사는 것보다 성격상 정리 안 된 모습 지켜보며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어 더 지치게 한다. 정리가 안되었다고 누가 나에게 뭐라 말하는 사람은 없다. 내 성격상 용납이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도 나의 인생의 한 조각이다.
자연스럽게 주님이 나에게 주신 순명으로 받아들인다. 나를 향한 주님의 배려라고 해석한다.
땀을 흘린 후 시원한 물 한잔.
수양관 냇가와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산들바람.
참나무 그늘아래 앉아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 없다.
이것은 경험의 영역이다.
나에게 일은 힘겨운 노동이 아니라 주님이 허락한 축복의 시간인 것 같다.
역시, 인생은 해석이다.
해석이 병들고 삐딱하면, 삶이 구부러진다.
이런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살던지, 아니면 영향 안 받든지, 아니면 좋은 영향을 주든지.
베드로 사도가 말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벧전2:9). 너무도 훌륭한 문장이다. 부족하고 구부러지고 못된 성격와 삶의 태도를 지니고 살고 있는 나에게 너는 택하신 족속이고, 왕 같은 제사장이고, 거룩한 나라고, 주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신다.
나를 고쳐서 사용하시는 주님이 찾아와주지 않았다면 나의 지금의 모습은 아주 형편없었을 것이다. 마음 고쳐먹고 살자. 이왕이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적 영향을 주며 사는 것이 인생의 뒤안길에서 후회를 안하는 지혜로운 선택일 것이다. 오늘이 쌓여 미래의 나, 이미지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름은 단지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인생의 요약본이다. 어떤 이는 이름만 들어도 존경과 감동이 떠오르고, 어떤 이는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하루도 이름값을 하며, 최선을 다하리라. 잠깐 반짝이는 찰라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어리석은 모습과는 거리를 둘 것이다. 만남도 깊이 있게, 넓게, 지속적으로 은흔한 향기를 내는 사람으로 살리라.
결국, 내 이름이 주님의 손에 붙들려 선한 기억으로 남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름이 곧 나의 유산이며, 신앙의 향기이고, 나의 인생을 말해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