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사보나롤라와 웨슬리는 잠든 교회를 깨우고, 죽음의 침대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들을 일으키고자 하나님이 손수 보내신 종들이었다. 도시의 길을 거절하고 사막에 몸을 숨긴 수도사들의 전통이 없었다면 교회 시대는 이미 종언을 고했을는지 모른다. 수도원 전통은 그나마 교회의 갱신과 개혁을 위해 주님께서 남겨두신 “남은 자”요 “하나님의 씨앗”이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사모하며 교회의 변질을 괴로워하던 성도들은 하나, 둘 세상의 도성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장망성을 떠나 천성 가는 여정에 들어섰던 기독도처럼, 그들은 모든 것을 등 뒤에 남겨두고 세상의 변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롯의 처가 밟았던 전철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들은 한번 떠난 도성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은 순결과 열정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던 그들의 암벽 같은 의지였고 신앙 자체였다. 세상이 그들을 비웃고, 교회가 그들을 핍박했지만, 하늘의 부름에 응한 믿음의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칼을 들이대는 적들을 향해 축복을 빌었고, 비방의 단검을 찔러대는 동료들을 위해 길게 울었다.
사막의 교부들(Desert Fathers)은 이끌림을 받지 않고 누구를 이끌지도 않았으나 군중을 이끄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방문객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지 않았고 침묵과 고독의 영성을 통해 영적 순례의 길을 제시했다. 3세기 말엽 성 안토니가 이집트의 사막에 은거하면서 시작된 수도원 운동은 교회의 순결을 지켜내기 위한 보루였다. 안토니를 필두로 주상(柱上)성자 시므온, 파코미우스, 마카리우스, 아타나시우스, 클레멘트를 비롯한 영적 아비들(abbas)과 어미들(ammas)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하나님의 씨앗들이었다. 흑암 가득한 이 시대에도 세상과 소통하려는 하나님의 씨앗들이 있다. 한 사람 엘리야를 훨씬 능가하는 칠천 인의 무리들이다. 소수의 능력자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다수의 소통 가능자들이 흔들리는 교회의 기둥을 떠받치고 있음은 세상과의 소통을 끝까지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다수가 도시 교회의 종소리에 귀를 곤두세울 때 소수의 의인들은 우주의 탄식에 눈시울을 적셨다. 기름진 음식을 축복하며 떠드는 노랫소리를 뒤로 하고 순례길에 오른 각 시대의 성도들은 또 하나의 출애굽을 결행했다. 약속의 땅이 이르기도 전에 그들은 지쳐 죽어갔고 버려진 그들의 시신은 사막의 모래가 되어 부서져갔다. 아직도 도래하지 않는 왕국을 꿈에 그리며 황막한 환경에서 스러져갔지만 그들은 낙심하지 않았다. 묘비조차 세울 수 없는 무수한 주검들을 뒤로 하고 그들은 천상을 향한 순례 길을 재촉했다. 만물의 찌끼처럼 취급당할 때도 그들은 더더욱 마음의 도성을 단단히 세워갔다.
에세네파나 쿰란 공동체의 회원들처럼 그들은 빛의 자녀가 되어 자신들의 순결을 지켰다. 푸석한 모래를 밟으면서도 그들 의지만은 하늘을 거닐었고 육신은 무너져 내렸지만 영혼만은 강하고 순수했다. 그들은 사막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보석이었다. 사막의 방랑자들은 이제 오랜 세월 속에 묻혀버렸지만 그들의 숨결만은 아직도 세찬 박동으로 사막의 영성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그들의 영혼은 주님 품에서 안식을 누리겠지만 그들의 흐트러진 발걸음만은 지금도 세속에 찌든 사람들을 사막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