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역을 앓다’라는 표현과 ‘홍역을 치르다’라는 표현은 의미가 비슷한 것 같지만 쓰임새가 서로 다릅니다. ‘홍역을 앓다’는 말 그대로 홍역이란 전염병에 걸렸다는 표현인 반면에 ‘홍역을 치르다’는 심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의미의 관용구로 쓰이는 표현입니다.
저는 어릴 때 실제 홍역에 걸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입안에 생긴 발진으로 밥을 먹기조차 힘들어 축 처져 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께서 제 곁을 지켜주시며 들려주신 많은 이야기 중에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일화가 여태까지 제 기억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말이다. 굵기가 두 치이고, 길이가 석 자인 쇠막대로 모래판[沙板]에 글씨를 썼는데, 그 쇠막대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썼단다.” 나중에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실제 쇠막대의 치수를 알아본 뒤 피식 웃었습니다. ‘지름 약 6cm에 길이가 약 90cm인 쇠막대로 글을 써서 다 닳게 한다? 그것도 모래에 써서?’
하나님께서도 친히 돌에 글(십계명)을 새기셨고, 예수님도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문장을 어떻게 쓰셨는지 못내 궁금합니다. 바울은 탁월한 글솜씨로 편지를 많이 썼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벼루 10개가 구멍이 나고 붓 1,000개가 몽당붓이 될 만큼(십연천필[十硯千筆]) 글을 썼으며 박제가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글을 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앳된 중학생 시절 국어 선생님의 조언으로 「오아시스」라는 제호를 단 문집을 어렵사리 펴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물론 등사기로 프린트해서 말입니다. 난생처음 쓰는 ‘편집후기’를 거의 밤을 꼬박 새우며 완성했습니다. 그다음 날 교무실에서 국어 선생님께 보여드리자마자 떨어진 불호령은 지금도 기억에 또렷합니다. “야 이놈아, 내가 너보고 써오라 했지 언제 베껴오라 했냐?” 이유는 바로 첫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찬바람이 북에서 묻어 내려올 때 오아시스에는 향기가 흩어졌다.’ 바로 그때 옆자리의 한 여선생님이 한마디 거드셨습니다. “얘가 그 정도는 써요.” 그날 그 사건이 엄청난 ‘인정’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저는 글을 쓰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이 쓴 글을 고치고 다듬는 일을 하면서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말씀을 매 순간 곱씹으면서 할아버지를 추억하고 그리워합니다. 지금 저의 모습이 어쩌면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셨던 그 일화 덕분이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고, 고치고, 다듬으면서 저를 스스로 글쟁이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글쟁이란 말은 글 쓰는 사람을 낮춰 부르는 말입니다. 바로 ‘-쟁이’라는 접사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문가를 뜻하는 ‘-장이’라는 접사를 써서 글 쓰는 전문가를 뜻하는 ‘글장이’라고 쓰면 좋을 텐데, 아쉽게도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글장이’는 ‘글쟁이’의 비표준어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대상을 가리지 않고 ‘구조적 글쓰기’를 주제로 강의를 나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원장님, 제가요 글을 써 보겠다고 앉으면 갑자기 머리가 하얘지고,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요!” 글을 제어하는 요소는 생각이기에 생각이 조직적인 사람은 글도 조직적으로 표현됩니다. 제가 활용하는 글쓰기 구조 중 한 가지만 공유하려고 합니다.
바로 ‘BSS’ 구조입니다. 베토벤(Beethoven)-미끄럼틀(Slider)-백조(Swan)의 영문 첫 글자를 모은 것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베토벤 하면 순간적으로 떠올리는 운명교향곡처럼 글의 시작과 동시에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올 만한 내용으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B]. 그다음은 정보나 문장이 마치 미끄럼틀 탈 때처럼 매끄럽게 흐르도록 배열하는 효과가 필요하다는 원리입니다[S]. 마지막으로 백조는 평소에 울지 않다가 마지막이 가까워오면 구슬프게 울고 나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데 착안한 원리로 다음 글을 기대하게 하는 마무리입니다[S]. 어쩌면 제가 이 글 처음에 적은 ‘이성계 일화’는 ‘베토벤 효과[B]’, 마지막으로 공유하는 ‘BSS 구조’가 이 글의 ‘백조 효과[S]’일 수도 있겠지요.
박재역 원장∥중학교 교사를 접고 동아일보 교열기자로 입사했다. 동아일보에서 정년퇴직 후 중국해양대학교 한국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대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현재는 한국어문교열연구원을 운영하면서 문서 교열과 등록민간자격 '어문교열사' 양성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성경고유명사사전》 (2008, 생명의말씀사), 《교열기자의 오답노트》(2017, 글로벌 콘텐츠), 《다 쓴 글도 다시 보자》(2021, 글로벌콘텐츠), 《맛있는 우리말 200》(2023, 글로벌콘텐츠) 등이 있으며 현재 다산은혜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에 장로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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