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창】 조용한 혁명

  • 입력 2025.10.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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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역 원장의 한글 담은 은혜의 창(窓) (60)

언론사에서 교열기자로 재직하고 있을 때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습관에 따라 “동아일보 어문연구팀 박재역입니다”라고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뜻밖에 수화기 저편으로부터 꾸중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야, 박 집사, 넌 어떻게 인사도 할 줄 모르니? ‘안녕하십니까’가 그렇게 어렵니? 언론사 있으면 다냐?” 전화하신 분은 다름 아닌 저와 친밀하게 지내는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한 가지 간단한 결심을 하게 됩니다. 바로 인사말 먼저 건네기였습니다. “안녕하세요!”라고 말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제일 먼저 나누는 게 인사입니다. 대표적인 인사로 “안녕하세요?”를 비롯해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하는 “(만나서)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리고 살림살이가 어려웠던 시절에 생겼다는 “식사하셨어요?” 같은 인사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유가족에게 건네는 인사는 좀 특이합니다. 관례적으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는 인사말을 건네기도 합니다만 요즘 들어서는 “많이 서운하시지요?” “마음이 많이 아프시지요?”라는 인사말을 주로 건넵니다. 그런데 “천국 가셨으니 기쁘시죠?”라는 인사말을 듣고 황당해하셨다는 어느 권사님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유가족만 할 수 있는 말이 아닐는지요? 그래서 권사님은 황당해하셨을 테고요.

아무튼 저는 그 장로님의 전화를 받은 이후 어디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마주치기만 하면 의식적으로 인사말을 먼저 건넸습니다. “안녕하세요!”라고요. 회사 내 휴게실이든, 화장실이든, 식당이든, 엘리베이터 안이든, 선배이든 후배이든, 동료 기자이든 손님이든 먼저 인사말을 건네기 시작했습니다. 언젠가부터 회사 내에서는 누구랄 것도 없이 인사말을 먼저 건네는 조용한 혁명이 확산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정년퇴직하는 날 회사 게시판에 재직 중 감회를 담은 작별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러자 1,000건이 훌쩍 넘는 격려의 댓글이 달렸습니다. 저에게는 조용한 혁명이었습니다.

로널드 잉글하트는 ‘조용한 혁명(The Silent Revolution)’이란 개념을 주제로 책을 썼습니다. 잉글하트는 이 조용한 혁명을 서구에서 가치의 측면이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 전환한 것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하부구조의 가치 변화를 통해 상부구조의 가치 변화를 견인하는 사회운동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하부구조가 경제 중심에서 라이프스타일 중심으로 가치관이 바뀌며 상부구조의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지요.

혁명이란 과거의 무엇을 ‘단번에’ 깨뜨리고 새로운 것으로 ‘급격하게’ 변화시키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성경에서는 조용한 혁명을 누룩의 발효 작용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누룩은 유대인이 빵을 구울 때 넣어 부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발효제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갈라디아서 5:9) 하는 거짓 교사의 가르침을 경계하기도 하고 바리새인의 외식(마태복음 16장)을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천국을 누룩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마태복음 13:33).

제가 섬기는 교회 경로대학에서 참석한 분의 수보다 더 많은 선물을 준비했는데도 가끔은 모자라기도 했습니다. 누군가가 자기만의 방법으로 한두 개 더 받아갔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그 작은 선물에 욕심을 좀 낸다는 것 자체가 죄 짓는 일이라고 보기도 어렵고 ‘별것’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소한 욕심도 누룩 작용을 해서 복음을 전파하는 길에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런 비신사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습관과 관련해서도 조용한 혁명이 필요할 듯싶습니다.

인사말 먼저 건네기뿐만 아니라 작지만 나쁜 습관을 ‘단번에’ 멈추기, 좋은 습관을 ‘급격하게’ 들이기, 이런 것은 모두 조용한 혁명에 해당하기 때문이지요.

 

박재역 원장∥중학교 교사를 접고 동아일보 교열기자로 입사했다. 동아일보에서 정년퇴직 후 중국해양대학교 한국학과 초빙교수로 재직하며 중국 대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현재는 한국어문교열연구원을 운영하면서 문서 교열과 등록민간자격 '어문교열사' 양성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성경고유명사사전》 (2008, 생명의말씀사), 《교열기자의 오답노트》(2017, 글로벌 콘텐츠), 《다 쓴 글도 다시 보자》(2021, 글로벌콘텐츠), 《맛있는 우리말 200》(2023, 글로벌콘텐츠) 등이 있으며 현재 다산은혜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에 장로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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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본헤럴드(https://www.bonhd.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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