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죄인이다(For all have sinned, and a sinner).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죄인이다(All men are equally sinners). 죄(罪, sin)는 법적 개념이고, 악(惡, evil)을 행동함으로 얻어진 평가이다(Sin is a legal concept, and a just obtained by acting evil). 죄의식(a sense of guilt)은 인간 스스로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혹은 타자에 의한 판단에 대한 의식이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죽음에 이를 죄인이 되었다. 아담 뒤로 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식(부끄러움)이 없는 경우는 없다.

스콜라 신학에서는 죄를 reatus culpae과 reatus poenae로 나누었는데, 전자는 부패에 대한 형벌이고 후자는 실재 형벌, 죽음을 집행함이다. 둘로 구분한 것을 바빙크, 벌코프, 박형룡은 긍정적으로 인정했음에도 우리는 선택과 생략할 수 있다. 바빙크는 개혁파 신학자들이 죄사함이 죄의 실재적 죄책(reatus actualis)을 제거하지만, 잠재적 죄책(reatus potenialis)을 제거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을 수용했다(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264). 바빙크는 죄가 양심의 평안을 빼앗는다고 제시했지만(464쪽), 죄(sin)가 아니라 죄의식(guilt)이 그렇다. 죄(罪)는 행동이나 의식이 아니라 판단된 상태이다(Sin is a state of judgment, not action or consciousness).

죄인은 첫째 특징은 부끄러움이고(창 3:7), 의인의 첫째 특징은 기쁨이다(살전 5:16). 부끄러움의 특징은 현재 자기 상태를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다(창 3:7). 그리고 부끄러움은 현재 자기 상태를 만족하지 못하고, 불편한 상태를 방어하기 위해서 스스로 어떤 행동을 한다.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한 행동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다.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행동은 패션(fashion)으로 미화되어 매우 강력한 산업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옷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소극적인 행동이었는데, 적극적으로 미화하여 비인간성을 극대화시켰다. 즉 명품 패션을 만들어서 인간을 외적으로 평가가 하도록 하며, 우수하거나 비참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죄를 구조화한 사회에서 인간은 무능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이 갖는 한계 의식, 무능은 매우 인간적이다. 다만 한계의 정점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보는가, 아니면 자기의 처절한 무능을 보는가가 다를 것이다. 대학생들이 자살하는데 명문대학교에서 더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그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자살하는 것은 한계까지 다다른 극대화된 인간이다. 그러나 그 자기 극점에 도달했을 때에 자기 무능이 폭로되었고, 자기 무능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생명을 상실시키는 것이다. 그 자기 한계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을 만나는 것은 구속주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께 반역한 인간의 죄가 해결되지 않으면, 결코 창조주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무능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살하는 많은 사람들은 유능한 사람이 많고, 늙은 사람이 많다. 유아 시절에 자살한 경우는 없다. 유아에서 소년으로 가는 길의 첫째 과정은 아버지의 무능을 파악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무능을 알아야 하고, 그 무능을 파악했다면 순수한 인간이다. 무능을 알지 못한 인간은 비인격적인 인간이고 위험한 인간이다.

무능한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오류를 범한다. 그것은 성경의 믿음의 조상들에게 모두 나타난 현상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믿음의 조상이나 선지자나 사도들도 오류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무류(infallibility)를 확신한다. 직접 계시가 종료된 시대에 모든 사역자는 오류를 갖고 있다. 개혁된 교회는 교회가 결정한 문서에도 오류가 있다고 판정하고 겸손을 요구하고 있다. 오류와 무능이 없는 분은 오직 한 분 주 예수뿐이다. 그는 참 사람이지만 죄가 없으신 사람으로 우리의 죄를 지려고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다.

우리가 존경하는 신학자나 목사에게 오류가 없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존경하는 선생에게 나타난 오류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선생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는 폐단이 발생할 수 있으며, 자기가 스스로 의롭게 되는 더 큰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교회 안에는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있고, 존경하는 선생이 그 가르침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물론 우리도 그렇다. 근묵자흑(近墨者黑), 흰 물감에 떨어진 검정 물감은 결코 검지 않으며 흰 물감도 결코 희지 않다. 기독교는 불교처럼 진흙 속에서 핀 연꽃을 보며 감탄하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의 창립자를 믿고 고백하며 전파한다. 어찌되었든지 주 예수를 전파하도록 합의한다면 오류가 있는 것에 대해서 염려가 없을 것이다. 오류가 없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파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복음은 변증과 전파 두 가지 사역을 해야 한다. 변론을 하기 때문에 전파를 쉬는 것은 죄이다. 변론은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한 사역이지만, 교회의 근본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존경하는 신학자에게서 오류를 발견했을 때에 놀랄 일이 아니다. 나에게는 더한 오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류에 매어 있지 않으며, 또한 오류를 수정하려고 최선을 다할 필요도 없다. 오류에서 놀람으로 자기 임무를 중지하지 않아야 하고, 복음 전함에 전력해야 한다. 선배 사역자들은 그러했고, 나도 그러 하고, 나의 후진들도 그러해야 한다.

(히 12:1-3)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1)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나의 오류와 무능의 함정에 대한 낙담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담력으로만 부여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리고 나와 같은 심정의 사람의 오류와 무능에 대해서 기쁘게 포용하며 인내해야 한다. 오류가 있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류가 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사람이다. 나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나의 친구이다. 오류와 무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과대망상, 편집을 피해야 한다. 나와 생각이 같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나의 생각은 나와도 일치하지 않는데, 타인이 일치한다고 주장한다면 100% 거짓말로 판단해야 한다. 앞의 표현이 과도한 표현인데, “사랑과 관용”으로 일치한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사상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리고 믿음의 대상에 대한 지식, 고백의 일치를 추구한다. 그리고 고백하는 주의 이름을 전파하기를 전력한다. 함께하는 사역, 내가 주님의 이름을 전파하는데 방해하는 동역자는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사상을 거부하는 동역자는 매우 당연하게 있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겸손하게 살고 좀 더 객관적인 인격을 갖게 될 것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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