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목보고서 (3)】 "앞으로 목회자는 아내와 자녀 그리고 지속적 사역 위해 자비량 준비해야"

편집자 주】 한국교회 내의 목회 환경이 변화되면서 이제는 교회 재정에 사례비를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다른 일을 하면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하지만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적 사명을 갖고 일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우리는 그 분들을 ‘일하는 목회자들(일목)’이라고 부른다. 현재 페이스북 <일하는 목회자들> 그룹에는 약 7천 명의 멤버가 가입되었다. 오늘은 세 번째 시간으로 <카페 어린왕자>와 <해죽순 사업>을 통해 선교를 확장하고 있는 이덕주 목사를 소개한다.

 

이덕주 목사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명의 딸 그리고 막내아들이 있다. 그는 해죽순 사업을 통해 국내작은교회들에 대한 선교후원과 자립을 돕고 있으며, '체험농장어린왕자', '카페어린왕자' 그리고 천안주복교회 청년부에서 사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고 있다.
이덕주 목사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두 명의 딸 그리고 막내아들이 있다. 그는 해죽순 사업을 통해 국내작은교회들에 대한 선교후원과 자립을 돕고 있으며, '체험농장어린왕자', '카페어린왕자' 그리고 천안주복교회 청년부에서 사역을 하면서 경제적인 자립을 이루고 있다.

1. 먼저 목회를 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Q1. 내 인생은 사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사스 이전의 삶은 아버지의 품을 떠난 탕자의 삶이었고, 사스 이후의 삶은 다시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온 탕자의 삶이었다. 2003년 도피차 갔던 중국 북경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한국에 나와 <칼빈신학대학교>와 <칼빈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마쳤다.

2.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스쿨링을 하고 있는데 이유가 있는가?

Q2. 누가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와 같은 삶을 살다가 주님께 돌아온 인생이기에 교회 밖에서 방황하는 성도나. 집안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있던 성도나 모두가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그 한 영혼이 우선은 내 아내요 내 자녀들부터라는 마음을 주셔서 가정목회를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왔다. 이것이 아이들을 위한 홈스쿨링을 하게 된 계기이다. 나에게 목회는 내 가정부터라는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나는 홈스쿨링이 꼭 정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물론 기존의 정규교육도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들을 신앙적 환경에서 키울 수 있는 방법은 홈스쿨링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과 유대관계가 좋다. 아이들에게 안수기도를 해 주면서 아이들과 스킨쉽을 한다. 어렸을 때부터 해온 것이라 이제는 매우 자연스럽다. 처음에는 많이 외로웠지만 코로나 시대라서 지금은 뿌듯함을 느낀다.

3. 홈스쿨링을 교육의 관점이 아니라 목회의 관점으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Q3. 그렇다. 나는 가정목회를 먼저 꿈꿨다. 그래서 아이들을 홈스쿨링을 선택했다. 아이들에게 신앙교육을 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앙으로 키우는 것으로 본다. 아이들을 세상 문화에서 구별시키고 싶다. 아이들이 최대한 어렸을 때에 세상 문화를 덜 접했으면 좋겠고 세상의 가치관을 좀 천천히 따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홈스쿨링을 했다. 결국은 아버지의 변화가 가장 중요했다. 부모님들이 이루어 내신 업적보다 자녀들의 문제가 항상 많다고 보았다. 나는 아버지를 통해서 자랐고, 그러던 중 아버지가 12살 때 자살을 하셔서 아픔과 상처가 있다. 그래서 가정목회와 홈스쿨링을 하나로 생각했다.

이덕주 목사 가정의 가정예배 모습. 사춘기 장녀와 차녀의 얼굴을 가려주는 센스가 느껴진다
이덕주 목사 가정의 가정예배 모습. 사춘기 장녀와 차녀의 얼굴을 가려주는 센스가 느껴진다

4. 용인에서 있다가 아산으로 내려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Q4. 용인에 있다가 아산으로 내려올 수 있는 계기는 아산에 홈스쿨링을 지원하는 곳이 있어서였다. 아산에 내려온 첫 해는 학교를 휴학한 자녀들과 대중교통을 이용해 캠핑도 가고, 자전거로 아산에서 팽목항까지 여행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이들과 성찬식도 한다. 사실 농촌생활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목공일도 하지만 전동드라이버조차 사용할 줄 몰랐다. 지금도 여전히 농촌생활을 하면서 익히는 중이다.

5. 농촌마을을 살리는 사업도 많이 진행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떤 일을 했는가?

Q5. 전도사 때 교회 개척을 했다. 어린이전도협회 새소식반을 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많이 왔다. 그 아이들이 아파트에서 뛰어다니까 아래층 주민에게 피해가 됐다. 그 아파트 맞은편 시골 마을로 이사를 왔다. 아이들과 같이 놀러 다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캠핑을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10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팽목항까지 간 기억도 있다.

농촌에 와서 농촌에는 정말 젊은 사람이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부터 동네를 위한 일을 뭐든지 관심을 두고 했다. 마을에 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총대를 메다시피하며 막아섰다. 그러면서 농촌에 대한 실정을 알게 됐다. 그렇게 마을과 가까워지자 마을에서 할아버지들이 쓰는 공간을 내 줘서 작은 도서관을 운영할 수 있었다. 농촌 마을을 살리는 사업들을 앞장서면서 마을 어르신들을 섬기는 일들을 했다.

6. 마을목회를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들을 했나?

Q6. 나는 교회가 지역사회를 섬기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농촌에 있다 보면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가운데 마을 만들기 지원사업들이 있다. 그러면 마을에 필요한 문화 복지를 위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나는 특색 있는 <문패 만들기>를 했다. 대부분의 농촌의 집들은 아버지나 남편 이름만 있다. 그래서 특색 있는 문패 만들기 사업을 통해서 그 집에 사는 모든 가족들의 이름을 쓰고 문 앞에 걸어줬다. 그러자 어떤 분들 중에는 평생에 처음 자기 이름이 걸린 문패를 보며 감격스러워하는 할머니도 보았다. 또한 마을 축제 중 하나로 가을음악회를 진행했다. 행자부 지원 공동체 활성화 사업을 통해 마이크 앰프 등을 셋팅하고 가을 음악회를 했다. 5월 달은 지역에서 활동하시는 가수 분들을 초청해서 콘서트도 열고 음악회를 가졌다. 마을 극장도 열어 마을 경로당에 영화를 상영했다. 어르신들이 좋아했다. 그 뒤로부터 복음을 전하면 쉽게 받아들인다. 그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마을 일을 하다보니까 마을에서 사과밭이 하나 나왔다. 그것이 2015부터 사과밭을 운영하면서 본격적인 자비량 목회를 시작한 계기다.

7. 해죽순 유통을 통한 수익과 선교 사업과 카페 어린왕자를 소개한다면?

Q7. 작년 4월부터 해죽순을 소개받고 해죽순 대리점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그래서 다른 분들을 섬기면 좋겠다는 생각에 작년 6월부터 매달 10명에 섬겨드렸다. 해죽순 사업을 하면서 작은교회 목회자들에게 재정적으로 섬길 수 없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해죽순을 나눔을 했다. 올 초에 해죽순을 직접 수입을 하게 됐다. 형님과 매형과 해죽순 직수입을 하면서 목회자들에게 100개 교회들을 섬기겠다는 마음을 가졌다. 카페 어린왕자는 체험농장어린왕자와 함께 일을 통한 수익을 위한 사업이다. 하지만 나는 카레 어린왕자를 나의 일터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곳은 나의 목회지다.

8. 자비량 목회를 하려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Q8. 신학대학교와 대학원 졸업 후 무조건 개척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개척을 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지 개척을 하려고 한다면 시골을 추천한다. 도시에서는 몇 천 만원에 개척을 하는 비용이라면 시골 목회에서는 몇 백 만원이면 가능하다. 또한 국가에서는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 농촌에 굉장히 많은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동네의 문화와 복지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앞으로 80% 이상의 목회자들이 자비량을 하지 않으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자비량 목회를 빨리 시작하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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