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제주에서 목회하고 있는 목사로부터 이기풍선교기념관을 소개받았다. 한번 가보라는 것이다. 순교의 영성을 배웠던 장소가 지금 어떻게 변했는지 보면 좋겠다고 했다. 이기풍선교기념관은 한라산 400m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1만여평의 대지 위에 2000여평 규모로 지어진 기념관은 제주 자연석으로 지어져 주변의 수려한 경관과 잘 어울린다. 기대하는 마음과 동시에 들뜬 마음으로 기념관에 도착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그런지 기념관에는 사람들의 그림자 조차 없었다. 사람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아 낙엽과 먼지와 썰렁함 그 자체였다. 제주의 자연석으로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만이 그 자리를 외롭게 지키고 있었다.

제주 공항이나 호텔 등에는 코로나와 상관없이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 그런데 순교기념관에는 관리인 조차  없이 건물만이 그 자리를 덩그렇게 차지하고 있었다. 기념관만 코로나의 한파를 겪는 듯 했다. 코로나로 인한 운영중단인지 아니면 원래 운영하던 교회나 기관이 선교기념관 운영을 잘못해서 그런지, 내부 사정은 잘모르지만 안타까운 마음이다.

이기풍선교기념관 입구 오른쪽에 3명의 순교자 비문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이기풍목사, 이도종목사, 배형규목사의 비문이 나무 십자가 옆에 서 있다.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3분 순교자가 기념관을 지키고 있었다. 3분이 주는 영적 감동이 황량함을 부요함으로, 삭막함이 은혜로 장소를 덮기에 충분했다.

이 땅에는 순교 영성 보다는 물질적인 복만 바라는 약삭 빠른 제자들만 더 양산해가는 것은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 대열에 나도 있지는 않은가? 주님을 위한 순교라는 단어 조차도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나에게는 세분의 비문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주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순교, 한 사람의 죽음 영성으로 인해 오늘 우리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 이 사실을 잊지는 말아야겠다.

한국의 사도 바울' 이기풍 목사

이기풍목사는18681121일 평양에서 태어나 1942620일 신사참배 반대로 모진 고문과 산고를 겪고 전남 우학리에서 순교했다 이 목사는 노방전도를 하던 마포삼열 선교사를 돌로 쳐 피를 흘리게 했을 정도로 기독교를 핍박했던 청년이었다. 그러나 "네가 나를 왜 핍박하느냐? 너는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변화됐다. '복음의 훼방꾼' 이 목사는 1894년 세례를 받았고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190797일 한국 교회에서 처음 목사 안수를 받은 일곱 목사 중 한분이다.

이기풍목사는 32세의 나이에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제주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마태목음 415에서 16절은 이 목사가 동양의 예루살렘 제주선교를 가슴에 담고 꿈꾸며 비전을 품었던 말씀이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4:1516).

1907년 인천항을 출발, 목포를 경유해 제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은 이 목사는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구사일생으로 이듬해 봄 제주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며칠이 지나도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고 어쩌다가 사람을 만나면 제주 방언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 심신이 지친 이 목사는 해안가에 전도를 나갔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한 해녀의 도움으로 깨어난 그는 그제서야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주 선교 첫 열매를 맺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부임한 이 목사는 190815,192732년 제주에서 사역하며 성안교회를 비롯해 10여 교회를 세웠다. 이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 칠순의 나이에 일제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했고 1942년 후유증으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선교관에는 이 목사의 가족 사진,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 출범 사진, 제주 성경 가두판매대가 있구, 이 목사의 아내인 윤함애 사모가 막내딸에게 '세상과 짝하지 마라' '5분 이상 예수님을 잊지 마라' '주의 종은 하나님 다음 가는 분이시다' , 보석같은 믿음의 유산으로 남겼다.

"이도종목사 제주 출신 첫 목회자"

이도종목사는 제주 출신의 첫 목회자이다. 그는 청년시절 3.1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고 제주의 기독지도자 양성을 위해 멀리 만주까지 다니면서 제주 성경학원의 건립을 위해 모금운동을 하던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는 1948년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자 혼란한 시기에도 교인 심방을 계속했다. 성도 심방을 가다가 무장대에 붙잡혀 솔밭 구덩이에 생매장 당했다.

이 목사는 교회의 지도자이며, 제주도의 첫 목사이다. 그는 마지막 까지 복음전도와 사명을 위해 살다 하나님 앞에 부름받았다. 그의 순교의 피와 헌신은 또 다른 많은 열매로 맺었다.

배형규 목사(1965~2007): 무장 팔레반에 피납되어 순교

20077월 배 목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단기선교활동을 하던 중 무장 탈레반에 납치되어 순교하였다. 그의 신앙을 기리는 순교기념비가 그의 고향 제주도에 세워졌다.

배 목사의 비문에 청년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는데 일생을 걸었던 사람이다. 비문은 평소 자신의 인생의 좌우명이요 사명이다. 평소 배 목사는 내가 하나님앞에 살아가는 이유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이 한 마디로 그의 삶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영원히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신호등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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