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효목사, 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와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피 www.koreanchurch-swiss.com 
김정효목사, 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신학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피 www.koreanchurch-swiss.com 

불행한 나의 기억

"김전도사님,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나에게 고백할 것이 있지 않아요?"


내가 신학교 대학부 2학년 때 겪었던 매우 불행한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46년이라는 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일이 생생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때 나는 신학교에서 기숙사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2학기 학기말 시험을 몇 일 앞둔 어느 날 같은 방을 사용하고 있던 졸업반 선배가 나를 조용히 불러내 수업이 없는 빈 교실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학생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매우 활동적이었고, 사교성도 뛰어나 학생들과 교수진들의 신망이 두터웠습니다. 나와 고향이 같았던 그는 평소에 나에게도 친절히 대해줬기 때문에 나는 아무 의심 없이 그를 따라 들어가 그와 마주앉았습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별일이 아니라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김전도사님, 혹시 나에게 고백할 것이 없습니까?‘고 물었습니다.

그가 태연히 웃으며 말했기에 나는 그가 나에게 장난으로 하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웃으며‚ 아니요. 아무 것도 없는데요.‘ 라고 가볍게 받아 넘겼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로김전도사님 분명히 나에게 고백할 것이 있을 텐데요라고 말한 후 마치 고해성사(告解聖事)를 기다리는 신부(神父)처럼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습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여전히 나는 그가 나에게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 역시 웃으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전도사님께 고백할 것은 없는데요.‘라고 가볍게 응수했습니다. 그랬더니 그의 표정이 엄숙해지며, 김전도사님,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나에게 고백할 것이 있지 않아요라고 약간 목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잠시 우리 돌 사이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그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해야 할 일들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 역시 정색을 하며, 나 정말로 전도사님께 아무 것도 고백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마치 나를 달래듯이김전도사님, 그러지 말고 그냥 솔직히 말해 주세요! 그러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그 어떤 불길한 일이 나에게 닥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 불길한 일이란 혹시 이 선배가 돈 문제 때문에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내 생활이 매우 궁핍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혹시 돈 문제입니까? 돈이 없어졌습니까정색을 하며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렇습니다.


내 책상 서랍 속에 넣어둔 돈이 없어졌는데, 나는 없어진 그 돈을 김전도사님 책갈피 속에서 찾아냈습니다. 내 서랍에서 없어진 돈의 액수와 일치합니다. 훔친 돈이 아니라면 왜 책갈피 속에 돈을 숨겨둡니까?‘라고 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며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돈을 전도사님께서 가져가셨습니까그랬더니 그는 그 돈은 일단 증거물로 내가 압수했습니다.

김전도사님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면 나는 이 돈을 회수하는 선에서 덮고 넘어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상 그 돈은 학비에 보태기 위해 출판사에서 책을 떼어다 팔고, 입금하기 위해서 모아둔 돈이었습니다. 그 돈의 액수는 지금으로 치면 일반 회사원 한달 봉급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책갈피 속에 숨겨둔 것은 한 방에 네 명씩 기거하는 기숙사 방문에는 지금과는 달리 잠금 장치가 없었고, 각자에게 할당된 책상 서랍에도 열쇠를 채우는 고리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같으면 은행에 넣어둘 수가 있지만 그 때만 해도 은행통장을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고, 직장급여도 현찰을 봉투에 담아 지불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즉시 돈을 돌려달라고 사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가 기숙사 회장에게 이 일을 알림으로써 기숙사에서는 나에 대한 조치를 취하기 위한 긴급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숙사 사감은 이 문제를 즉시 학생과장님에게 보고했습니다.

 


도둑 누명을 쓰고 퇴학 처분당하다


모든 정황은 나에게 절대 불리했습니다. 나는 졸지에 도둑으로 몰렸고, 아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나는 학기말 시험이 다가 오는 그때까지도 2학기 등록금을 납부하지 못하고 있었고, 기숙사비를 낼 돈 마저 없어 기숙사 식당에서 밥도 먹을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나의 주식은 서울역 뒤쪽에 있는 노동자 식당에서 지게꾼들을 위해 파는 20원짜리 싸구려 칼국수가 다였습니다. 그마저도 하루에 한끼로 때울 때가 많았습니다. 내가 그렇게 어렵게 생활했던 이유는 홀로된 노모와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동생들을 돌봐야 하는 가난한 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생활이 궁핍한 어머니는 고향에서 남의 집 밭일을 해주고 근근이 두 동생들 밥은 먹였지만, 학교 수업료며 책값 마련이 여의치 않아 다급하실 때면 염치불구하고 서울에 있는 학교 기숙사로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럴 때면 출판사에 입금하기 위해 수금한 책값을 어머니 손에 쥐어드렸습니다. 그러면 어머니는 한없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며 그 돈을 받아 가지고 집으로 가는 완행기차를 타시기 위해 서둘러 서울역으로 가셨습니다. 물론 이 같은 형편을 같은 기숙사 방을 쓰고 있는 그 선배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돈이 없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제일 먼저 나를 의심했고, 나 몰래 내 모든 소지품을 샅샅이 뒤졌으며, 심지어 증거확보를 위해 내 일기장까지도 다 훑어봤습니다.

 


그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일기 중의 기도문은 도둑질에 대한 나의 양심의 가책을 고백한 것이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기숙사 회의가 끝난 후 기숙사 회장은 개인적으로 나를 불러다 심문을 했습니다. 그 역시 등록금도 못 내고 기숙사비도 못 내는 형편에 어디서 돈이 나서 어머니 오실 때 돈을 드리느냐고 따졌습니다. 그 두 사람 뿐 아니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는 사람들 역시 나의 결백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배는 학생들과 교수진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웠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가 나에게 터무니 없는 누명을 씌웠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집안형편이 풍족했던 그 선배는 신학교에 다니면서도 일반대학 영문과에 적을 두고 있었고, 새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집에서 가져온 돈을 서랍 속에 넣어 놓고 마음껏 꺼내 쓰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세탁기가 없었던 그 시절 대부분의 기숙사생들은 각자의 세탁물들을 손으로 빨아 말렸지만, 그만은 속 내의로부터 모든 세탁물들을 나이 많은 용문산 출신의 여자 신학 생에게 따로 맡겨 세탁뿐 아니라 다리미질, 바느질까지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수시로 다른 학생들은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하는 군것질을 자주 했는데 그럴 때마다 서랍 속에 넣어둔 돈을 쑥쑥 꺼내 썼습니다. 그렇게 돈을 헤프게 쓰다 보니 서랍 속의 돈이 도둑맞은 것처럼 줄어들었을 것이고, 이는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던 나에 대한 의심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내 책갈피에 보관된 돈이 훔쳐간 자기 돈이란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자기가 도둑 맞은 돈의 액수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도저히 도둑 누명을 벗을 수 없게 된 나는 학교 강당에 올라가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눈물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사흘 단식기도를 마치고 방에 돌아오자 즉시 학생과장님이 불렀습니다. 그분은 잘못을 인정하고 선배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나를 한참을 타일렀는데, 내가 절대 훔치지 않았다고 완강히 버티자 마침내는 몹시 화를 내며 자네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야! 더는 학교에 머물게 할 수 없어! 자네에게 퇴학처분을 내렸으니 당장 기숙사에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기숙사 방에 돌아온 나는 그 선배 앞에서 대성통곡을 한 후 모든 소지품을 그대로 두고 기숙사를 나왔습니다. 너무도 막막했던 나는 특별히 갈만한 곳 마저 없어 그날 온 종일 서울 거리를 몽유병 환자처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 하루는 나에게 너무도 고통스러운 자책과 자학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래 목사 될 자격이 없는 내가 목사 되겠다고 신학공부를 시작해 결국 이런 벌을 받고 말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한없이 슬프고 괴로웠습니다.


다음 날 새벽이 되어 서울 역 앞 대우빌딩 뒤편에 있는 한 교회로 새벽기도를 하러 갔는데, 캄캄하기도 했지만 들어가는 입구를 도무지 찾을 수 없어 그냥 교회 철문 앞 돌 바닥에 엎드려 흐느껴 울며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눈을 떠보니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기척이 느껴져 뒤를 돌아다보니 오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한 여자 분이 서있습니다. 그분은 계면쩍어 하는 나에게,


선생님, 나 이 교회 교인인데 새벽기도 하고 나오다가 엎드려 기도하는 선생님을 발견하고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제가 다 들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한 말씀만 드리고 가겠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고 그녀는 갔습니다.


그날도 나는 온종일 마냥 서울 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갈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이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고, 세상은 그런 나를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밤이 되니 그날은 너무도 추워 얼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 당시 나는 시내버스 표 한 장 살 돈마저 없어 몇 시간씩 걸어 다닐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나는 염치불구하고 종종 서울에 사는 손위 누이 집을 찾아갔습니다. 신학교 입학 할 때 그 누이는 고맙게도 자기의 결혼패물을 저당 잡히고 나의 입학금을 마련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어머니와 두 동생의 형편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나를 무척이나 미워하고 원망했습니다. 매형 역시 그런 내가 찾아가는 것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너무 배가 고파 밥이라도 한끼 얻어먹으려 가면 누이는 심하게 면박을 주었고, 놀부가 흥부 쫓아내듯이 내쫓았습니다. 그러면서 차비대신 빈 병 몇 개를 들려주며 가다가 이거라도 팔아 차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눈칫밥 얻어 먹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날이면 광란이 나 밤새도록 고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염치 불구하고 밤늦게 누이의 집을 찾아갔던 그날, 생각지도 않게 누이와 매형은 나를 무척 반겨줬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겨울방학 동안 내가 따로 지낼 방을 구해놓았다는 것입니다. 식사는 자기들과 같이 하고 그 방에서 지내며 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나는 누이부부에게 차마 학교에서 퇴학당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누이는 그 동안 본의 아니게 나를 구박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든지 매 끼니마다 그 비싼 꼬리곰탕으로 영양보충을 시켜줬습니다. 하지만 학업을 중도 포기했다는 자괴감 때문에, 그것도 도둑누명을 쓰고 퇴학당했다는 억울함 때문에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버스를 타고 이전에 일했던 회사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버스가 회사 정문 앞을 지나는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들뜨면서 기쁘고 행복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뭔가 좋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정류장에서 황급히 내려 무작정 그 회사 쪽으로 갔습니다. 회사 정문의 경비실 직원들은 이전에 함께 근무했던 나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사차 들렸다는 나를 선선히 들여보내주었습니다.

삼천 여명의 남녀 종업원들이 일하는 대 회사였습니다. 나는 원래 공업고등학교 화공과 출신으로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 회사에 취직을 했었습니다. 당시로서는 그런대로 수입이 꽤 좋은 편에 속하는 직장이었습니다.

나는 회사 근처의 하숙집에서 기거하며 가까운 동네 교회에 교인등록을 했습니다. 지금은 아주 큰 대형교회가 되었지만 그 때는 아주 작은 시골교회였습니다. 신앙이 뭔지도 모른 채, 구원이 뭔지도 모른 채 어릴 때 습관으로 교회를 다니던 나는 그곳에서 마침내 거듭나는 은혜체험을 했고,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감격을 체험했습니다. 그런 다음부터는 참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목회자로서의 소명감을 갖게 되었고, 신학공부를 소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그럴만한 여건이 못되었습니다. 극도로 가난한 집안인데다가 어머니와 두 동생을 돌봐야 하는 가장의 책임까지 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새벽기도에 나갈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봐도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습니다. 마냥 적절한 때를 기다릴 수 만은 없어 마침내 기한을 정해 놓고 결단을 위한 작정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작정기도를 마친 후 직장에 사표를 내고 신학공부를 시작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작정기도기간이 끝나가자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나의 계획이 무모하고 무책임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학자금 마련과 어머니와 두 동생들에 대한 생활대책이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작정기도 마감 이틀을 앞두고 신학공부 계획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가장의 책임을 다하며 그냥 성실한 평신도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작정기도가 끝나던 그날 아침 직장에 출근하자마자 회사 서무과의 호출을 받았고, 찾아간 서무과 직원은 내가 그날로 해고되었다고 통보를 해줬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나는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고 그토록 소원했던 신학공부를 시작했는데 2학년 2학기를 다 마치지 못하고 학교에서 도둑누명까지 쓰고서 퇴학을 당한 것입니다. 그날 버스에서 내린 나는 전에 근무했던 회사의 부서 책임자를 찾아갔고, 그분의 배려로 다시 옛 직장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전에 내가 직장에서 해고된 것은 나에게 어떤 큰 잘못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행정착오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다 엄밀히 따진다면 그것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나를 신학교로 인도하시려는 강권적인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였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직장에 복귀해서 첫 월급을 받은 나는 그 월급봉투를 움켜쥐고 한없이 눈물을 쏟았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서러움에 북받친 눈물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다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와 두 동생을 나의 사는 곳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학교에서 도둑 누명을 쓰고 쫓겨난 직후 그 추운 엄동설한에 오갈 데 없었던 내가 그토록이나 나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누이 집에서 잠시나마 기거할 수 있었던 것도, 또 그렇게도 쉽게 옛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참으로 놀라운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기숙사에서 선배에게 도둑누명을 쓴 후 학교강당에 올라가 꼬박 사흘간이나 식음을 전폐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호소했음에도 불구하고 퇴학처분을 당했을 때는,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리셨다는 생각 때문에 참으로 마음이 참담했고, 하나님이 많이 원망스러웠었습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실제로는 내가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 눈물로 호소하는 그 사흘 동안 동안 여호와이레의 은혜로 나의 미래를 위해 모든 것들을 계획하시고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복학 신청을 하다


직장생활을 통해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고, 어머니와 두 동생들 뒷바라지까지 할 수 있게 되자 다시 신학공부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음해 가을학기기가 시작될 무렵 나는 학교를 찾아가 나를 퇴학시킨 그 학생과장님께 다시 신학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학생과장님은 선선히 나의 복학을 허락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기적의 역사였습니다. 기숙사사건을 아는 학우들의 눈총이 따가웠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다시 신학공부를 하게 된 것이 기쁘고 감사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출석이었습니다. 도저히 학업과 직장생활이 병행될 수 없는 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직장에서 자청해서 배려를 해줬습니다. 학교수업에 차질이 없도록 근무시간을 편성해준 것입니다. 하루에 두세 시간 밖에 수면을 취할 수 없는 고달픔이 따랐지만 그래도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 결과 학급에서 영어, 히브리어, 헬라어는 항상 최고 점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학우 하나가 나와 친해졌는데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시내버스정류장으로 함께 걸어가던 이 학우가 불쑥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내가 전도사님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도둑누명을 씌운 그 선배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와 동향이고 고등학교 동기동창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선배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겠다며 일단 자기 집으로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그날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서류 하나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서류는 바로 나에게 도둑누명을 씌운 그 선배가 소속 교단의 전국 교회에 보낸 호소문이었습니다. 그 선배는 교회개척을 해서 목회를 참 잘하고 있었는데, 그의 교회를 탐냈던 같은 교단의 목사가 그가 교인들 몰래 교회를 팔아 넘기고 도망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교회에서 쫓겨나게 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뒤집어 쓴 그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교단에 속한 전국교회에 호소문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를 모함한 목사의 치밀한 계략에 휘말려 결국은 목회활동을 중단하고 소속 교단에서 탈퇴했다고 합니다. 오랜 기간 목회를 하다 보면 함께 공부했던 분들의 소식을 간간히 듣게 되는데, 그 선배에 대해서만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아무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직장에 복귀해 안정된 수입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 두 동생들은 끝까지 학업을 잘 마쳤습니다. 바로 밑의 남동생은 대학을 졸업한 후 군 장교로 군복무를 했고, 군 복무를 마친 다음에는 한국의 한 대기업에 입사하여 주로 해외지사에서 근무를 했고, 다니는 회사의 상무이사, 일본 지사장을 거친 다음 퇴직을 한 후, 잠시 한 조선회사의 부사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독립하여 개인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밑의 여동생은 서울 명문대학의 간호학과를 나와 대학병원에서 근무를 하다가 스위스에 와서 특수교육학을 공부했고, 이어 한국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대학강의와 다양한 환자들을 수용해 치료하고 돌보는 요양원 원장의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직장생활을 하던 중 군복무를 하게 되었는데, 군 복무를 하면서도 야간학교 교사로 일하게 되어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대 후 다시 직장에 복귀한 다음에는 직장에 금요예배를 조직하여 매주 금요일마다 종업원들을 상대로 예배인도를 했습니다. 신학교 대학부를 마친 다음 총신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냈는데, 감사하게도 꽤 규모가 큰 한 교회에서 나를 부교역자로 받아줘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학업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을 마친 다음 곧장 스위스로 건너와 지금 현재 39년째 스위스 현지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만나 결혼할 무렵에는 하나님께서 수 중에 돈 한푼 없는데도 집을 장만하게 해주셨고, 스위스에 올 때도 비자 받기가 아주 어렵다고 했는데도 대학원 졸업시험 마지막 날 스위스 대사관으로부터 비자가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스위스에 온지 두 달 만에 나는 내 몸에 치명적인 병이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감사하게도 당시 스위스 대학병원의 담당 교수가 그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여서 그의 수술 집도로 나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나는 신경외과분야의 세계 제 1인자였던 그가 스위스에서 마지막으로 수술을 집도한 환자였습니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곳에서 나를 만나게 된 것을 하나님에게 감사하십시오!"


나는 스위스에 온 후 한국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왔는데, 83살에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이곳에서 어머니를 모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3년간 치매를 앓으셨지만 그럼에도 매 주일마다 휠체어로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면서 차질 없이 목회사역을 했습니다. 돌아가시면 그냥 이곳에서 장례를 치르고 싶었지만 막무가내로 한국으로 가고 싶다고 하셔서 한국 누이 집으로 보내드렸는데 가신지 3달 만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 동안 참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와 신세를 지고 가는 바람에 항상 집이 비좁았었는데, 스위스에서 태어난 두 딸들이 커가면서 그들을 위한 공부 방까지 따로 필요하게 되자, 하나님은 수중에 준비 된 돈 한 푼이 없는 가운데서도 큰 정원이 딸린 크고 넓은 집을 구입하게 해주셨습니다. 역시 기적이었습니다.

스위스 한인교회의 교인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임시체류자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형편이 많이 불안정합니다. 그간 바젤 한인교회, 취리히 중앙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를 목회하면서 많은 분들을 섬기고, 돌봐드렸는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교회형편이 어렵고 힘들어도 함께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들만은 꼬박 꼬박 붙여주셨습니다.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의 역사 가운데 되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였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아멘

※참고자료: 사선을 넘어 스위스에서 30년 사역을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20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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