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개신교 목사, 순교자, 토마스 선교사


한국 최초의 개신교 목사로서의 <순교자(殉敎者)>는 영국인 선교사 <저메인 토마스 목사(Robert Jermain Thomas, 1839.9.7-1866.9.5)>입니다. 영국 <웨일즈><라야다>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저메인 토마스 목사><라야다> 지역의 작은 <회중 교회(會衆敎會)>의 사역자인 아버지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슬하에서 < 개신교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일찍이 해외선교에 뜻을 둔 토마스 목사는 런던 대학 <뉴 칼리지>에서 대학과 신학 과정(1857-1863)을 마치고, 그의 나이 24 때인 1863 63일 그의 고향 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목사안수를 받고서 곧 바로 갓 결혼한 그의 아내 <캐롤라인> 과 함께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지인 중국 <상해>로 떠났습니다.

몇 달간의 긴 항해 끝에 마침내 상해에 도착했는데, 임신 초기인데다가 긴 항해 동안 심한 뱃멀미까지 겪은 그의 아내 캐롤라인은 몸이 많이 쇠약해져 있었습니다. 상해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그의 동료와 함께 멀리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는데,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그가 없는 동안 임신 중이던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 유산을 하고서 과다출혈로 홀로 죽어 있었습니다. 그것도 죽은 지 일주일도 더 지난 끔찍한 시신의 상태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엄청난 고통과 슬픔에 잠기게 된 그는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토마스 목사><런던선교회>에 편지를 썼습니다.

김정효목사, 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신학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피 www.koreanchurch-swiss.com 
김정효목사, 1983년 2월 스위스 사역시작, 취리히 중앙교회, 바젤한인교회, 인터라켄 쉼터교회 담임. 총신대학교신학 대학원졸업,  스위스한인교회 홈피 www.koreanchurch-swiss.com 

"처음 편지가 이런 것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 캐롤라인이 지난달 24일에 세상을 떠났 습니다. 더 글을 써 내려가지 못하겠습니다."


이 편지는 토마스 목사의 처음이자 마지막 <선교보고>였습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다가 현지 런던 선교회의 현지 책임자들과도 뜻이 맞지 않자, 그는 결국 선교사 직을 사임하고 청나라 <산동성 지푸 세관>에서 통역일(18651-8)을 했습니다. 세관 통역 일을 하던 토마스 목사는 <조선>에서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동성>으로 피난 온 조선인 천주교 신자 두 사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들이 비록 천주교 신자이긴 해도 그들이 기독교신앙 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기독교의 상징><십자가>와 기도할 때 사용하는<묵주(默珠)>뿐인 것 을 보고서, 조선으로 가서 조선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조선을 새로운 <선교지>로 정한 <토마스 목사>는 일하던 세관에 사표를 내고서 조선으로 들어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중 마침 조선으로 들어가는 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문성경>을 많이 준비해가지고 조선의 서해안으로 떠난 것이 18659월이었습니다. 그는 황해도 연안 <창린도(昌麟島)>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을 그곳에 머물면서 주민들에게 한국어를 배웠고, 그들에게 성경 이백여 권을 나누어주며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다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조선에서의 전도사역을 재개하기 위해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기회를 찾고 있던 토마스 목사는 때마침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 >가 조선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18667월 그는 조선인들에게 나누어 줄 다량의 한문 성경을 준비하여 <제너럴 셔먼 호>의 통역 겸 안내자로 마침내 다시 조선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배가 서는 곳마다 주민들에게 성경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항해 도중 주민들에게 나누어준 한문성경이 천여 권이었습니다.

약 일 주일 후 <제너럴 셔먼 호>는 대동강 입구 <용강 군>에 당도했고, 강 상류로 거슬러 <평양 성>으로 항진을 계속했는데, 배가 머물자 <평양 감영>의 문정관(問情官)이 배에 올라와 목적지가 어디며 항해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서툰 우리말로 통역을 했는데, 문정관들은 외국과의 무역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너럴셔먼호>는 항진을 계속하여 <만경대 한사정 (閑似亭)>까지 올라와 조선측에 통상을 요구했고, 거칠고 오만한 선장은 배에 올라 그들의 행동을 제지하던 중군 (中軍) 이현익 (李玄益)을 붙잡아 감금하기까지 했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이 같은 선장의 무모한 행동에 반대했고 그를 당장 돌려보내라고 했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평양 성 내의 관민(官民)들이 크게 격분하여 강변으로 몰려들었고, <제너널 셔먼 호>를 향하여 물러 가라고 고함을 치며 돌을 던지고, 활과 화승포(火繩砲)를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상선답지 않게 중무장을 하고 있던 <제너럴 셔먼 호>는 소총과 대포를 이들 관민에게 마구 쏘아 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이런 와중에 서해의 썰물 때가 되자 강물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제너럴 셔먼 호>는 그만 강바닥에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는 이 때를 노려 상류에서 작은 배 여러 척을 연결하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불을 붙인 <신탄선(薪炭船)>을 떠내려 보냈습니다. 이 신탄 선이 <제너럴 셔먼호>에 닿자 배가 불타기 시 작했습니다. 배에 불이 크게 번지자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강으로 뛰어 내려 강변으로 헤엄쳐 나왔는데, 강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난 병사들은 뭍에 오르는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칼로 쳐 죽였습니다.

 


<토마스 목사> 역시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성경을 품고서 강으로 뛰어 내려 헤엄쳐 나왔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토마스 목사>는 강변에 이른 다음 그를 죽이려는 성난 병사들 앞에서 무릎 꿇어 하나님께 마지 막 기도를 드렸고, 그러한 <토마스 목사><퇴교(退校) 박춘권(朴春權)>이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렇게 <토마스 목사>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서 최초의 <개신교 성직자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가 만 27세였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품고 온 성경을 강변 여기저기에 뿌렸는데,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한 권을 주었으나 받지 않자 그대로 모래사장에 던진 후 그의 칼을 맞고 순교했습니다. <박춘권>은 자기 칼을 맞고 죽어가는 서양 사람이 건네주는 책을 받지 않았으나, 상황이 끝나고 돌아 갈 때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는 갖고 간 성경을 정독한 후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훗날 <안주 (安州)교회><영수(領袖)>가 되었습니다. 그날 상황이 종료된 후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오늘 서양 사람 하나를 죽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에 웃으면서 책 한 권을 내밀며 받으라고 권했습니다. 결국 그를 죽이 기는 했지만, 그 책을 받지 않을 수 없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으로 초기 조선 교회의 부흥에 큰 영향을 끼친 <한석진 목사>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평양에 온 것은 임진년 10, 즉 주후 1892년으로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지 26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이때 저는 <성경>을 팔며 전도하러 다니던 중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목격한 사람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데, <제너럴셔먼 호>가 불에 탈 때 바깥으로 성경을 던지면서 "야소(예수)!"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전도하는 내용과 팔러 다니는 책자가 그 서양인이 배에서 던진 책과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군중 속에 열 두 살 난 소년<최치량(崔致良)>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숙부를 따라 나왔다가 <토마스 목사 순교장면>을 현장에서 목격하였고, 토마스 목사가 뿌린 한문성경 3권을 주어 집에다 보관했습니다. 책 소지자에 체포 명령이 내리자 사람들은 사건 현장에서 주운 성경을 불에 태우거나 강에 버렸습니다. 하지만 소년 최치량은 주워 보관하고 있던 한문성경 3권을 <토마스 목사>가 뿌린 성경을 회수해 폐기 처분하라는 명을 받은 < 영문주사 (營門主事) 박영식(朴永植)> 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박영식> 은 이 성경들을 불에 소각시키지 않고 한 장씩 뜯어 벽지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벽지로 도배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 (李榮泰)>가 그의 집에 들렸다가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서 그 역시 예수를 믿게 되었 습니다. 박영식의 집 벽에 도배된 성경을 읽고서 예수를 믿게 된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남 장로교회>의 선교사 <레이널즈(W. Reynolds, 李訥瑞)> <조사(助事)>가 되었고, 한국인 성서 번역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 번역>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오랜 후 <최치량>은 사업에 성공하여 <물상객주(物商客主)>가 되어 평양 대동 문 안에 집을 사 여관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여관의 전 주인이 바로 <박영식>이었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평양 대동강변에서 <박춘권>의 칼을 맞고 순교 한지 33년째 되던 해인 189310월 어느 날, 한국에 파송 된 후 주로 서울에서 활동을 하다가 평양에 들린 <미국 북 장로회> 소속 <마포 삼열 선교사(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가 평양에 들려 <최치량>의 여관에 묵게 되었는데, 그는 여관 방 벽이 온통 한문성경으로 도배된 것을 보고서 그 연유를 물었습니다.

<토마스 목사>의 순교 현장의 목격자요, 여관 주인인 <최치량>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게 된 마포 삼열 선교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믿고, 여관 방 하나를 세로 얻어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낮에는 거리에서 그리고 밤에는 사랑 방을 찾아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결과 3개월 후에는 7명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
마포삼열 선교사

여관 주인 <최치량>은 본시 술꾼이었고 도박과 색을 즐기는 사람이었으나, <마포 삼열 선교사>의 감화 로 변화를 받아 신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교인들의 숫자가 불어나 더 이상 여관방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최치량은 <널다리골>의 홍종대 (洪鐘大)의 집을 사서 새 <예배처소>로 사용했는데, 이것이 바로 <평양장대현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경기도 이천에 설립된 ‘평양장대현교회’본당. 실제 크기를 5분의 1로 축소해 복원했으며 남녀를 구분해 앉았기 때문에 ㄱ자형이다.
경기도 이천에 설립된 ‘평양장대현교회’본당. 실제 크기를 5분의 1로 축소해 복원했으며 남녀를 구분해 앉았기 때문에 ㄱ자형이다.

<마포 삼열 선교사>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에 복음을 전파 하여 곳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평양신학교
평양신학교

그는 또 목회자 양성을 위해 1901년부터 평양에서 신학교육을 시작했고, 1904년에 정식으로 <평양 신학교 교장(1904-1924)>으로 취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07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서경조, 이기풍, 길선주, 한석진, 방기창, 양천백 등 7인이 <평양 장로회 독 노회>에서 한국교회 역사상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이들은 제각기 한국 초대 교회의 부흥운동에 크게 기여를 했습니다.

미국 <북 장로회><한국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평양>에서 일어난 복음의 불씨는 점점 번져서 7명의 세례교인으로 시작하여 1949년에는 신도수가 7만여명에 이르렀고, 세례교인 수만 해도 25791명 이라고 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국의 기독교 인구는 1400만명인데 그 중 개신교인들의 수가 천만 명 이고, 천주교인들의 수가 400만명입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서구와의 불행한 접촉이었으나 그 이후 역사는 흥미롭게 전개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과 미국간의 외교문제로 발전하였고,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 6)>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조미(朝美) 양국 간의 <통상조약(1882)>이 체결되었고, 외국인의 조선거주를 보장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1884년에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앨런(Horace Newton Allen, 1858. 4.23- 1932.12.11)>이 입국하게 되는데, <토마스 목사 순교> 18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토마스 목사의 순교>는 한국교회의 보이지 않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가 죽임을 당하고 60년이 지난 1926, 평양의 <오문환 장로>는 토마스 목사의 생애와 죽음에 대한 소책자를 발간했습니다. 그는 이 책자에서 <토마스 목사>의 피가 뿌려진 대동강 물을 마신 자마다 예수를 믿었고,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만큼 한국교회의 거룩한 도성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박춘권>의 칼을 맞고 죽은 <토마스 목사>의 시체는 토막 나 강변에서 불태워졌는데, 1927년에 조직된 <토마스 기념회>192758일에 토마스 목사가 묻힌 <쑥 섬>에서 토마스 목사 순교 60주년 기념 예배를 거행했고, 이 예배에는 1천여명의 신자들이 참석했습니다.


평양과기대
평양과기대

<토마스 기념회>1932914일에 토마스 목사가 순교한 대동강 변에 <토마스 기념예배당>을 건립 했고, 19331014일 봉헌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교회당은 육이오 전쟁 중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는데, 놀랍게도 바로 그 장소에 한국교회의 후원을 받 는 <평양 과기대>가 지난 2010년도에 개교한 것입니다. <평양 과기대의 설립>의 궁극적인 목적은 북한 선교의 재 점화를 위한 것입니다. 참으로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 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토록 보존하리라! (요한복음 12:24-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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