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온 후 첫 번째 맞는 겨울이다. 하늘에 닿을 듯 키가 큰 더글라스 숲에 첫눈이 내렸다. 크리스마스카드에서 보았던 그 풍경들이다. 우리나라 보다 100배 크기의 넓은 땅을 가진 캐나다는 서부 밴쿠버지역을 제외하곤 대부분은 겨울 내내 눈과 함께 겨울을 난다. 좀처럼 눈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태평양만을 끼고 있는 밴쿠버에 이토록 많은 눈이 내린 건 처음이다.

게으른 농부가 뒤늦게 목화수확을 하듯 시나브로 낙화하는 솜덩이는 예수탄생을 축하하는 이브의 선물이다. 밴쿠버는 한 겨울에도 온화한 기온으로 대지는 파릇파릇 초록세상이 된다. 그 초록바다에 순백으로 조화를 이룬 풍경은 무한한 감사와 충만으로 가슴이 먹먹해 지고만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여명에 첫눈을 바라보며 빛이 바래지 않은 먼 기억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이야기 하나


석간을 돌리고 시간이 나면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있었던 내 열다섯 11월 하순의 어느 날 첫 눈이 내렸다. 신문배달, 가정교사 등 하루를 끝내고 옥수동 마루턱에 도착하면 자정이 되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가장자리 전봇대에 등을 기대 땀을 닦으며 올려다본 하늘엔 목화송이가 하나씩 떨어지고, 주황색 가로등에 비친 그 신기루를 따라 오감을 전율케 하는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들어본 음색은 예민한 내 감성을 적시고 이내 허공으로 사라졌다. 감전된 듯 그 선율을 애써 붙잡아 보려는 순간 가슴에서 올올이 뽑아져 나온 명주실 같은 그 음색은 눈앞에 일렁이는 바다가 되고 말았다. 언제인 듯 파도처럼 밀려온 가을잔해들은 발등을 간지럽히고 그 위로 첫눈은 소복이 쌓이고 있었다.

서울 성동구 옥수동 마루턱엔 오래된 전파상이 하나 있었다. 자정까지 송창식과 나훈아의 노래가 들렸던 그곳에 신기루를 연상케 하는 이 서양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잠시 전봇대에 기대어 휴식을 취할 때면 어김없이 이 음악이 흘러나와 매일같이 전봇대에서 자정을 맞았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전파상 고등학생 딸이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학교가 끝나면 전파상을 지키다 문을 닫는 다는 것을....이때 내 생에 첫 경험한 영혼의 오르가즘이었다. 나를 그토록 설렘과 환유로 전율케 했던 그 음악은 폴모리아가 연주한 '이사도라'였다는 것도 한참 뒤에 알았다.

내 열다섯 사촌기의 감성도 첫사랑의 눈뜸도 사치일 수밖에 없었던 그때 가장 힘든 것은 배고픔도 추위도 고독도 아니었다. 늘 나를 눈물 나게 했던 것은 엄마가 보고 싶을 때였다. 첫눈에 투영된 엄마의 모습은 그대로 첫눈과 함께 내린다.


이야기 둘


혼자 살아야 하는 서울 생활은 쉽지 않았다. 수 만 명이 넘는 큰 교회를 개척해 성공한 사촌형과 아주 잘사는 친척들이 많았지만 홀로 살아야 한다고 작정한 후론 단 한 번도 그들을 찾아간 적도 누구에게도 배고픔을 얘기해 본적이 없다.

그때 유일한 나의 친구는 책이었다. 교과서는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순수 문학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런 와중에 기타학원엘 다녔다. 이론과 함께 코드 잡는 법을 익히는 게 쉽지 않았지만 금방 대부분의 곡들을 연주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백옥처럼 흰 살결에 밤색 안경을 낀 A가 기타를 건네주며 “며칠 너희 집에 좀 보관해 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부모님들이 알면 자기는 쫓겨날지 모른다며 교본도 함께 건네주었다. 엉겁결에 기타를 받아 들었지만 적잖은 고민이 아니었다. 열쇠조차 없는 판자 집 아는 형에게 얹혀 사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며칠 후 기타를 도저히 보관할 수 없어 돌려주려 학원엘 갔더니 그가 보이질 않았다. A는 대학입시 때문에 시험이 끝날 때까지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선생님은 편지 한통을 건넸다.

 


" 우리 첫눈이 내리는 밤 장충동 공원에서 만나자" 편지 끝머리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나보다 위인 그녀는 재수를 하고 있는 동안 기타를 배웠고 내게도 틈틈이 가르쳐 주어 친해졌지만 무척 당황스러웠다.

일찍 한파가 찾아온 그 해 겨울 심한 감기로 며칠째 누워있었다. 비몽사몽간 눈을 뜨니 한 밤 중이었고 밖에는 함박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길을 나서 뛰었다. 이미 발목까지 내린 눈은 장충단공원을 은백의 세계로 페인트칠 해 놓았다.

가로등만이 홀로 그 자리에 서 있었고 희미하게 보이는 발자국 하나가 어렴풋 보일 뿐.

(1)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의 수도인 빅토리아에서 RV 리조트를 운영(2)CGB(capital of Golden Bridge) CFO 역임(3)M&A Specialist(기업인수합병 및 기업가치평가 전문가)(4)해지사모펀드 운영(5)The CJ Holdings Canada(2013~현재) CEO문화방송 청소년문학상 대상월간 "순수문학" 신인상한국문인협회 주관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 당선한국문인협회 회원
(1)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주의 수도인 빅토리아에서 RV 리조트를 운영(2)CGB(capital of Golden Bridge) CFO 역임(3)M&A Specialist(기업인수합병 및 기업가치평가 전문가)(4)해지사모펀드 운영(5)The CJ Holdings Canada(2013~현재) CEO문화방송 청소년문학상 대상월간 "순수문학" 신인상한국문인협회 주관 "월간문학" 신인상 공모 당선한국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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