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캅(Polycarp) 주교는 로마정부로 부터 '큐리오스 카이사르(Κύριος Caesar)' 카이사르가 주님이라는 고백을 강요받았다. 폴리캅은 그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큐리오스 예수스(Κύριος Jesus)'라고 대답하며 믿음을 지켰다. 그는 이 믿음 때문에 순교하게 되었다. 당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큐리오스 예수스'의 고백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구원받은 자로서 희생이 따르더라도 예수님이 주되심을 인정하고 충성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초대교회 당시 로마 황제를 숭배하지 않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은 모진 고난과 핍박을 당해야만 했다. 예수님을 믿는 고백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독립할 당시 '메시아닉 쥬'40여 가정 정도만 있었는데 조금씩 늘어나 지금은 만여 명 정도 된다. 유대인이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이들은 자기들을 예후딤 메시히임(Jehudim Messihiim)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정통 유대인들의 핍박에도 목숨을 걸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소망하고 있다.

바울 당시 로마 정부는 신앙고백을 하면 죽이고 고백하지 않으면 석방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로마로부터는 수치와 능멸을 당하였지만, 하나님께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당할 수치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대신 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당해야 할 수치와 저주를 대신 받으셨기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 변치 않는다면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전혀 없다. 도리어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예수님을 주로 믿는 믿음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중세 교부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로마 교황청에서 교황을 만났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각국으로부터 금은보화를 실은 마차가 교황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교황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아퀴나스여, 초대 교황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했지만, 우리는 은과 금을 풍성하게 가졌습니다. 각국에서 들어오는 금은보화를 보십시오. 놀라운 교회 건물과 장식을 보십시오." 그러자 아퀴나스가 교황에게 말했다.

"초대교회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초대교회보다 아름다운 교회를 지었습니다. 금으로 기둥을 만들었고, 대리석으로 바닥을 꾸몄습니다. 땅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교인도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은과 금도 많아졌지만 초대교회가 가졌던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능력이 없는 교회라면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라 할지라도 부끄러움을 당할 수밖에 없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은과 금이 아니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이름과 능력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그분을 대상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주이심을 믿는 단계에서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임을 고백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믿음을 인정하시고 자녀와 백성으로 삼아주신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주님께 속한 자라는 증거를 보이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이심을 믿고 선포하는가? 불신앙의 죄를 회개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를 바란다. 예수님을 부르는 자만이 주를 만날 것이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자가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는 복음 전도에 일생을 바쳤다. 영국 여왕을 만난 후 방명록에 "일평생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겠다. 월리엄 부스"라고 적었다.

여왕이 방명록을 보고 부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이 그렇게도 좋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부스는 "그렇습니다. 저는 물구나무를 서서 걸으며 발바닥으로 탬버린을 치면서라도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고 싶습니다. 저를 보고 사람들이 미쳤다고 해도 좋습니다. 조롱해도 좋습니다.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기만 하면 나를 보고 미쳤다고 해도 오직 예수님만 전하며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부스는 복음 전파에 대한 단호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다. 영혼을 살리는 일이 어떤 일보다 우선순위에 있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최선의 일이다.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최고의 일이다.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충성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바울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증거하였다. 그 모습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복음을 주신 하나님의 행사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행사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까지 죽게 하신 일이다. 그리고 우리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이름이 아름답기에 전하는 발걸음도 아름다운 것이다. 이 발걸음은 발로 걷는 행위만이 아니라 말과 행동을 가리킨다. 복음을 전하는 말과 행동은 하나님께서 부끄럽지 아니하게 하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전하는 믿음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독일의 신학자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유대 랍비를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랍비가 뜻밖의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부버는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랍비가 다그치며 재차 물었다.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런 질문을 처음 받은 부버는 선뜻 대답을 못했다. 랍비가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평생 하나님을 믿어왔고, 하나님에 대해 강의를 해왔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어 대답했다. "물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후 부버는 자신에게 물었다. "왜 랍비의 물음에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못했을까? 평생 하나님을 믿어왔는데, 또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했는데 왜 머뭇거렸을까? 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을까?"

계속 고민을 하던 부버는 그 해답을 찾았다. 삼인칭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익숙했지만, 이인칭의 하나님에 대해서 익숙하지 못한 것이다. 부버는 객관적으로만 하나님을 연구하고, 하나님에 관한 책을 쓰고 강의를 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삼인칭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지식적으로 잘 알고 익숙하였지만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되는 이인칭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독대하는데 익숙하지 못했던 것이다.

최병희목사, 전주아름다운교회,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최병희목사, 전주아름다운교회,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우리의 믿음 역시 부끄러운 모습은 아닌가?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다.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하시다라고 말하는 삼인칭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익숙하지만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지 못한 모습은 아닌가? 하나님은 예수 믿는 자를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정죄함이 없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신다. 영광으로 높여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차별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을 보시고 대하신다. 그러므로 인격적으로 만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소망한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