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욱 목사의 세상읽기 ①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이상욱 목사│목민교회(인천) 담임, 호서대학교( Ph.D),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

언어가 생겨나기 전의 인류는 화가 나면 흔히 화나게 만든 상대방을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언어가 생겨나면서 화날 때면 상대방을 욕을 하는 것으로 화를 풀어 살인 현상이 많이 줄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근 몇 주간 윤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세상사 말 많은 건 의례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할 말이 있고, 자중해야 할 말이 있다. 그리고 옛 선언들은 양반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고, 상놈이 쓰는 언어가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말이라고 다 말은 아니라고 훈계했다.

이 새끼, 저 새끼이 말은 사실 욕이라기보다 상투적 비속어라고 정의하면 맞을 것 같다. 욕이란 인간이면 거의 누구나 다하는 것이라고 하면 맞는다고 보는 데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을까? 이 상투적 비속어를 들으면 듣는 태도에서 아무렇지 않게 듣는 이가 있느냐면, 자존심 상해 그 자리를 뜨는 분, 아니면 사과하라고 그 자리에서 지적하는 등등의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 상투적 비속어를 일반인이 아닌 지체가 높은 분들이 쓴다면 그것은 질타를 받는 것은 마땅하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언행에 신중히 처리해야 하는 것은 그가 맡은 책무가 막중하기도 하지만 신분이 공적 신분이기 때문이다. 이 비속어를 자신도 모르게 내뱉었다면 그 자리에서 정중하게 사과하면. 아니 나중에라도 사과를 정중히 하면 다 지나가는 일로 되어 버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것을 사과하지 않고 하지 않았다고 우기거나 다른 말을 했다고 항변하면 할수록 세상의 사람들은 그를 비웃고 만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깊은 성찰의 장을 마련한 철학자가 마틴 하이데거Heidegger이다. 그는 언어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정의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이 그 언어의 집에 산다. 사색하는 자들과 단어를 가지고 창조하는 자가 이 집의 지킴이들이다. ... 인간은 마치 자신이 언어의 창조자이고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동물과 다른 언어의 주택에 살면서 인간의 존재 방식을 인간은 존재의 집이라 표현했다. 인간의 존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 수준을 넘지 못한다. 인간 존재의 수준은 의식주와 같은 경제적 요소가 아닌 사용하는 언어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언어는 생각의 그릇을 담은 것이기에 생각과 존재를 결정한다. 별생각 없이 말한다고 해도 말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조상들의 생각과 마음을 이야기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언어 속에서 생활한다. 한 단어가 있으면 그것을 가리키는 개념이 되고, 대상은 말에 의하여 규정된다.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 말대로 된다는 비정한 법칙에 예외가 없다. 희망을 노래하면 희망이 온다. 가수들의 삶을 보면, 자신이 부른 노래 가사처럼 삶과 노래가 연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울한 가사나 부정적인 기사, 즉 우울하고 부정적인 말은 그런 삶을 만들 확률이 높다. 그러나 맑고 밝고 환하고 긍정적인 기사, 다시 말해 환하고 긍정적이며 즐거운 가사와 말의 고백은 그런 삶을 만들어 낸다.

민족의 흥망성쇠도 문화와 언어에서 시작된다. 역사적으로 보면 도시를 점령하기보다 마음을 지배해야 지속된다. 언어와 문화를 잃게 되면 정신도 육체도 망가지기 마련이다. 몽고족인 원나라와 만주족인 청나라의 경우 중국을 정치적으로 정복했지만 언어를 빼앗지 못해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사고를 바탕으로 언어를 창조하고, 사고의 결과인 언어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이처럼 사고한 내용이 언어로 표현되고 사고의 폭이 넓어지면서 발전하게 된다. 언어는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생각과 느낌을 형성하고 규정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고도 달라질 수 있다.

하이데거는 게오르게의 시 <>의 마지막 시행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말이 부서진 곳에서는 어떤 사물도 존재하지 않으리라."

Martin Heidegger

일자천금一字千金,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말 한마디에 빚을 갚기는커녕 천 냥 빚을 더 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언어를 통해 상대방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개인 간 혹은 비즈니스 세계에서도 하이데거의 존재의 언어는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 비즈니스 상대의 정직한 언어는 비즈니스 자체를 정직하게 만든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과거 항공기 제작사인 더글러스와 보잉사가 최초의 대형 제트 여객기를 이스턴 항공사에 팔기 위해 경합을 벌였다.

에디 레켄배커 이스턴 항공사 사장은 평가결과 더글러스사를 낙점했다. 다만 소음방지 장치가 미흡하니 보잉사보다 더 우수한 소음방지 장치를 달아 주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지를 답장해 달라고 말했다. 더글러스의 답장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회사의 기술자들에게 조회해 본 결과, 소음방지장치에 대한 약속은 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러자 레켄배커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나는 당신이 그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얼마나 정직한지를 알고 싶었을 뿐입니다. 이제 135백만 달러 상당의 항공기를 주문하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적인 느낌이나 사고, 가치, 신념 등을 언어로 표현한다. 반면에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우리의 사고나 정신세계를 형성하거나 지배하게 된다. 어떤 경로로든 언어는 나란 존재의 집이며 우리사회라는 존재의 집이다.

오늘날 돌아가는 사회를 보면 우리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협적인 존재는 경제위기도 아니며, 태풍도, 코로나19 팬데믹 현상도, 이해관계가 얽힌 부동산정책도, 양심 없는 정치인도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 위협은 바로 우리사회를 보이지 않게 휘감고 있는 집단적 어리석음의 ''이다. 개인이건 집단의 말이건, 말을 통해 개인과 사회는 본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인간다운 일상과 행·불행에 간과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이 엉뚱하게 흘러가고 있다. 여당은 윤 대통령이 언급한 단어가 날리면이라고 해명하면서도 이를 최초 보도한 MBC를 고발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여권 내부 증언에 따르면 바이든으로 들린다는 사람은 다 때려잡자는 분위기라고 한다. 장르가 코미디에서 스릴러로 바뀌고 있다. 대국민 가족오락관이 된 느낌이다.

특히 요즘 무슨 '종교''단체'라는 다중의 힘을 빌려 말할 때 말은 용기라는 이름의 광기로 돌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과거 입에 재갈이 물렸던 군부독재 시절에는 숨죽이며 몸 사렸던 그 비겁한 용기들이다. 어찌 보면 이런 비겁한 용기는 막스베버의 말대로 우리 같은 '평균적인 인간들의 결함'일지 모른다. 그래서 니체는 그런 비겁한 광기는 개인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집단이나 정치적 당파, 민족의 이름으로는 흔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성적인 '호모 사피엔스'였다가도 집단이나 무리를 이루게 되면 어리석은 '호모 데멘스', 즉 광기의 인간으로 돌변한다는 것이다. 광기의 인간, 신뢰가 사라지는 정치, 이것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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