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준모 목사의 시편 강해(1)

서론)

시편의 정문 시편1편 

시편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찬양, 기도, 축제의 신앙 시 모음집이다. 시편은 이스라엘 국가 형성기로부터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까지의 작품들이다. 시편은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과 약 800년의 역사적 기간을 포괄하고 있다.

히브리 성경 원문에서 시편은 테힐림’(Tehillim)으로 불린다. 이는 히브리어 동사 빛을 발하다, ‘환호하다’, ‘기뻐하다의 뜻을 가진 할랄’(hallal)에서 유래되었다.

영어에서 시편’(Psalms)은 라틴어 번역본인 벨게잇의 시편 제목인 ‘Liber Psalmorum’에서 유래되었다. 또한 라틴어 역본의 시편 명칭은 헬라어 역본의 시편 제목인 살모이’(Psalmoi)에서 유래되었다. 이 뜻은 현악기에 맞추어 불리는 노래라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율법(토라), 선지서(느비임), 성문서(케투빔) 등으로 삼분하고, 시편을 케푸빔의 범주에 포함시켰다.

칼빈은 시편을 영혼의 모든 부분들의 해부학’(An anatomy of all the parts of the soul)이라고 일컬었다. 그 이유는 시편에 거울처럼 인간의 모든 지정의 요소들이 다 담겨있기 때문이다. 시편에 인생의 모든 사랑, 기쁨, 소망, 미움, 고통, 슬픔, 근심, 두려움 등이 다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다. 건축물의 정문에 해당된다. 시편 1편의 정문을 통해 시편이란 전체의 구조물에 입장하게 된다. 구약 성전을 구조물이라고 할 때, 시편 1편의 정문을 통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성전에 들어간 성도들은 탄식, 찬양, 기도 등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성전 문지기는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가게 할 것이다. 오직 의인들만 성전에 들어와 감사, 찬양, 간구, 탄식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신령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다.

시편 1편의 구조는 1-3에서는 의인의 모습, 4-5절에서는 악인의 모습, 6절에서는 의인과 악인의 결말로 구성되어 있다.

시편 16절을 가리켜 시편 1편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시편에는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대조시키고 있다.

 

1. 의인의 길

1.1. 소극적 측면에서 의인: 행하지 않는 자

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했다.

히브리어 원문에 1절을 직역하면, “복되도다. 그 사람이여!”라고 되어 있다. 히브리어 에셰르”(esher)는 여기에서 행복이나 만족의 의미를 지닌 복으로 번역되어 있다. “에셰르”(Esher)는 히브리어 아샤르(ashar)에서 파생되었다. 그 어근은 똑바르다또는 옳다를 의미이다. 의인은 하나님 앞에 옳고”, “올바른삶을 사는 자이다. 그렇게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은 복된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밝히고 있다. “악인의 꾀를 쫓아 걷지 않는 그 사람,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그 사람, 조소꾼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그 사람이 복되도다라고 직역할 수 있다.

복되도다(아쉬레)!라는 말은 구약에서 총 44회 나온다. 그 중에 26회가 시편에, 8회가 잠언에 나오고, 욥기와 전도서에 각각 1회씩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동양적, 물질적, 현상적 복과는 전혀 다르다. 이 말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안에서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신약 팔복에 나오는 복(마카리오스)는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는 자들의 복된 상태를 의미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Blessed”최고의 행복또는 긍극적 성취를 의미한다.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는 실제로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보이스(Bois)는 이것은 축복의 다양성이나 강조성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하였다.

스펄전(Spurgeon)본문에서 '왕도 복이 있고, 학자도 복이 있고, 부자도 복이 있다'라고 언급하지 않고 그저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복이 역사에 이름이 오르고 명성의 나팔을 울리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 잊혀진 자들, 무명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복된 사람 즉, 의인은 세 가지를 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걷지도 않고 서지도 않고 앉지 않는다고 했다. 즉 복된 사람은 가서는 안 될 길, 서서는 안 될 곳, 앉아서는 안 될 자리 등이 있다.

이것은 의인들의 지향점, 생각 내용, 행동 사항, 삶의 목표 등에 대한 언급이다. 의인은 악인과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 소속 영역이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죄의 점진성을 발견할 수 있다. “걷다가, 따르다가, 앉게 된다것이다. 이것은 죄의 진행 과정을 언급하는 것이다.

클라크(Clark)여기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교훈은 죄가 점진적이라는 것이다. 하나의 사악한 성향이나 행위는 다른 성향이나 행위로 이어진다. 나쁜 계획을 세우는 자는 머지않아 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 악한 일에 자신을 버리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완전히 배도하는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의인이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와

죄의 점진성 걷다, 따르다, 앉다

 

1.1.1. 의인은 악인들의 꾀를 좇지 아니한다.

악인들(레솨임)은 죄인, 오만한 자와 동의어이다. 이것은 5,6절에 나오는 의인(챠디킴)과 대조된다. 악인은 곧 불 경건한 자들이다. 이들은 악한 도모, 계획, 꼬임에 혈안이 되어 있다. 여기에 언급된 (에차)”는 악인들이 도모하는 책략이나 그들이 도모하는 모임을 말한다. 그러나 의인은 그러한 유혹을 받아 넘어가거나 그대로 따르지 아니한다. 의인이 깨어있다면 다양한 사람, 다양한 방법으로 악한 자의 유혹과 꾐을 분별할 수 있다.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고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결단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주신다.

의인은 불경건한 자의 꾀를 분별할 줄 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많은 경우, 자신에게 당면한 문제에 대하여 조언이나 설명을 듣고 이것이 경건한 권고인가, 불경건한 권고인가?”라고 분별하지도 못하고 분별할 생각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의인은 불경건한 자의 계획이 얼마나 악한 것이며 그것에 유혹을 받아 자신에 미칠 엄청난 영적, 육적 손실을 분별할 수 있다.

또한, 의인은 분별력이 필요할 때, 그것이 어디에서 온전하고 경건한 권고를 찾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시편에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119:24).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 인생의 최고의 상담자가 되신다. 또한 경건한 교사, 리더, 상담가는 항상 연약한 자를 세워지고 도와주기 위해 하나님의 진리 말씀에서 그 원리를 찾게 된다.

 

1.1.2. 의인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죄인들(하타임)은 하나님의 표적을 빗 맞추는 사람들이다. 죄인들의 길 곧, 죄인이 행하는 관습, 삶의 방식을 일컫는다. 의인은 죄인이 서 있는 그 길을 안다. 그래서 그 길에 결코 서지 않는다. 길은 방향을 말한다. 의인은 죄인과 같은 방향으로 여행하지 않는다. 의로운 사람은 사람이 적게 다니는 길을 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길이 바로 축복과 행복, 영생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태복음 7:13-14)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의인은 시편 1611절의 말씀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이요 기쁨의 길이요 영원한 즐거움이 넘치는 길이다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1.1.3. 의인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오만한 자”(레침)비웃다루츠에서 온 말로서 신앙을 비웃는 거만하고 부패한 자들을 의미한다. 오만한 자는 교만하고 방자하여 하나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아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일을 비웃고, 비판하고, 비평하기를 일삼는 자이다

오만한 자는 다른 사람들이 교회 지도자, 교회와 타인에 대하여 비판하고 평가하고 폄하할 때, 그 자리에서 함께 그들과 함께 말을 섞는 자가 되기 십상이다. 인간의 마음에 악한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리에 함께 앉아 남의 허물이나 약점을 들추어내면서 노닥거리는 것은 바로 자신이 오만한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스펄전(Spurgeon)은 상상 밖에 말을 언급하였다. “만약 어떤 자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쁜 말을 할 때에 용감하게 이렇게 외쳐라, 그 나쁜 말을 나에게 쏟아 부으라, 여러분들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나는 그를 사랑합니다

 

1. 2. 적극적 측면에서 의인: 행하는 자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2.1. 의인은 율법을 즐거워한다.

그의 기쁨은 여호와의 율법에 있다. 시편 전반에 걸쳐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표현은 성경의 처음 다섯 권, 모세 5경의 "율법" 부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일컫는다.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한다.

즐거워한다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며 기꺼워하며 적극적으로 그분의 언약의 말씀을 사랑하는 모습을 가리킨다(40:8). 의인, 즉 언약의 백성은 그분의 언약의 말씀을 평생 읽고 준수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는 길이다. 그 결과 복과 생명을 얻고 형통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우리를 감격하게 하는가? 이것들이 바로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만약 자신의 개인적인 즐거움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면, 그 사람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즐겁다면 더 좋을 수도 있지만 이것 역시 여전히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 의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자이다.

마틴 루터(Matin Luther)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낙원에서도 살 수 없지만, 하나님 말씀이 있으면 지옥 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다는 의미심장한 표현에 동감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어떤 기쁨, 어떤 최고의 즐거움을 가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결코 진공 상태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가치 없고 실망스러운 것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라고 스펄전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적절하게 설명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에게 그것을 해달라고 애원하거나 좋아해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는 혼자서 모든 일을 잘해 낼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쁨에 따라 우리가 얼마나 그 말씀을 사모하고 열망하는지를 측정할 수 있다.

 

1.2.2. 의인은 율법을 묵상한다.

묵상”(하가)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읽는다는 뜻이다(1:8; 63:7; 73:13; 143:5: 33:18). 묵상의 대상은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자신(63:6), 그분이 행하신 기이한 이들(77:12: 143:5) 등이다.

의인은 주야로 주의 거룩한 말씀을 묵상한다. 의인은 날마다 생명의 말씀을 묵상한다. 의인은 단지 말씀을 읽거나 듣고 곧 잊어버리지 않는다. 의인을 읽거나 들은 말씀을 깊이 생각한다. 자신의 삶이 비추어 본다. 깊이 말씀을 되새기고 음미하고 적용한다. 말씀의 거울 앞에 자신의 모습은 진솔하게 투영해 본다. 자신이 걸어온 삶, 걸어갈 삶에 대한 주님의 뜻을 찾아본다. 감사할 내용을 찾아 감사드리고, 회개할 모습을 찾아 회개한다. 결단하고 다짐하고 행동에 옮긴다.

말씀 묵상은 동양 명상과 전혀 다르다. 동양의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그러나 명상은 위험한 종교적 심리적 행위이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공허한 마음은 속임수나 악마의 영에 대하여 자신을 공개적으로 열어놓기 때문이다. 그 비우는 마음에 미혹의 영과 잡다한 생각들이 침투하기 쉽다. 그러나 기독교 묵상에서 목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이다. 이것은 각 단어와 문구에 대해 주의 깊게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주님께 다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과 교통과 교제가 이루어진다.

스펄전(Spurgeon)이 인용한 애쉬우드(Ashwood)묵상은 새김질을 하고 말씀의 감미로움과 영양이 있는 덕을 마음과 삶에 가져온다. 이것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많은 열매를 맺게 하는 방식이다.”라고 했다. 또한 스펄전은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읽기만 하고 묵상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부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독서뿐만 아니다. 영혼은 내부적으로 그것을 먹고 소화한다. 어떤 설교자가 무릎을 꿇고 성경을 20번이나 읽었지만 거기서 선택의 교리를 발견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설교자는 매우 불편한 위치에서 읽었을 뿐이다. 만약 그가 안락의자에 앉아 그 말씀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으면 그 말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의인은 적극적으로 말씀을

즐거워하고 묵상한다

1.1.3. 의인이 받는 복.

3절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의인이 받는 복은 항상 생명의 물이 있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강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항상 물이 있다. 의인은 항상 필요할 때, 곧 바로 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시들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끊임없이 궁핍하거나 갈증을 느낄 때, 우리 자신이 물있는 강가에 심겨졌는지 아닌지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의인이 받는 복은 뿌리가 깊이 내린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튼튼하고 안정적이며 뿌리 깊은 곳으로 뻗은 는 나무이다. 의로운 사람의 삶은 강인함과 안정감을 그 특징으로 한다. 나의 삶이 튼튼하며 안정적인가로 내가 어디에 심겨져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의인이 받는 복은 철을 따라 열매를 맺는다. 의인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5:22-23). 시냇가에 심긴 나무는 자연적으로 열매가 맺히게 된다. 그 나무는 생명의 근원에 심겨졌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5절에서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면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과일에도 계절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으로 행하기 시작할 때 낙담하며, 즉시 열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은 열매를 맺을 제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트랩(Trapp)하나님의 과수원에는 불필요한 나무가 없다. 그러나 때로는 사과나무가 그러하듯이 열매가 맺지 못할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나무들은 얼마가 지나다 보면 농부의 돌봄으로 다시 윤택하게 되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라고 위로의 언급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의인은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한다.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하고 시들어 말라버리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에게는 이러한 죽음의 흔적과 메마름의 흔적이 있지 않는다. 그의 ""은 녹색이고 살아 번성한다.

의인이 하는 일은 다 형통하게 된다. 의로운 사람은 고난과 역경에서 제외된 사람들이 아니다. 의인은 항상 형통한 길만 열리는 것이 아니다. 의인이 하는 모든 일이 항상 부유하고 편안하고 번성한 것만이 아니다. 그러나 의인의 삶도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역경 속에 거하게 될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한 것으로 인도해 주신다. 아무리 어려운 고난의 파고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고 궁극적으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가에 심긴 나무, 사진제공 : 정준모 목사
물가에 심긴 나무, 사진제공 : 정준모 목사

 

2. 악인의 길.

2.1. 위험한 악인의 길

 

4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2.1.1. 악인은 의인과 같지 않다.

의인에 대하여 언급된 모든 사실이 해당되지 않는다. 즉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안정적이고, 계속해서 생명과 자양분을 얻고, 열매를 맺고, 살아 있고, 번영하는 모든 것이 악인 곧 불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때로는 불경건한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들이 의인보다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악인의 삶에서 잠깐 머물다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것뿐이다. 결국 실제로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2.1.2 악인은 겨와 같다.

겨는 곡식 알갱이 주위를 둘러싼 얇은 껍질이며, 곡식 알갱이가 가루가 되기 전에 벗겨야 할 것들이다. 성경에서 무가치 것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35:5:21:18; 5:24; 17:13; 29:5; 33:11; 41:15; 2:35; 13:3; 2:2; 3:17). “는 악인의 허무함을 비유한다. “바람에 나는 벼시냇가에 심기운 나무의 견고함과 비교가 된다.

왕겨는 바람에 쉽게 날아가 버려 낟알과 쉽게 분리 될 정도로 가볍고 가치 없는 존재이다. 성경은 바로 불경건한 자들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실체가 의미 없고 허무한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스펄젼(Spurgeon)왕겨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하고, 죽었고, 쓸모없고, 실체가 없고, 쉽게 날아갑니다. 이것은 바로 나무와 왕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라고 했다.

 

2.1.2 악인은 결국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지 못한다.

5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악인에게는 무게가 없으므로 심판 날에 부족함이 드러나고 만다. 다니엘서에서 벨사살 왕에 대하여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글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함이 보였다 함이요말한 바와 같으니 왕을 저울에 달아 부족함이 나타났느니라”(다니엘 5:25-27).

일순간 의인의 회중 안에 있는 죄인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미래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죄인은 의인과 같은 영광스러운 미래를 공유하지 못한다.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죄인들이 죄인으로 남아 있기를 고집한다면 자신들이 의인의 회중에 속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모임은 회중을 의미한다. 회중은 ‘company’라는 의미(, 모인 사람들, 친구, 단체, 회사, 회합 등)가 있다. 또한 ‘generation’이라는 의미(세대, 자손, 일족 등)도 있다(14:5). 회중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회를 가리킨다(13:9).

회중은 여호와의 장막에 유하며, 성산에 거하는 자들이다(15:1-2). 회중은 성일을 지키는 무리를 말한다(42:4). 회중은 성도들의 총회를 의미하며, “성도들의 집회를 의미한다(149:1). 결론적으로 의인의 회중(the congregation of the righteous)은 현세적으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로서 사랑과 돌보심 속에서 주어지는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의미한다. 또한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집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무리들의 모임을 의미한다.

 

결론)

 의인과 악인의 종국

“6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을 아시나니 의인은 평안할 것은 하늘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 그 길을 아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심이라.

히브리어 원문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아신다라고 되어 있다. 스펄전은 그분은 끊임없이 그들의 길을 바라보고 계신다. 비록 그것이 종종 안개와 어둠 속에 있을지라도 주님께서는 그것을 아신다.”고 했다.

그러나 악인, 죄인, 불경건한 자의 길은 망할 것이요 불경건한 자의 길은 멸망에 이른다고 결론을 짓고 있다. 그들은 지금은 편안한 길, 넓은 길, 번영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이요, 결국 그들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인생사는 두 길을 걷는 것이다. 의인의 길, 악인의 길, 그 길은 종국의 길이요, 날마다 결정짓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는 길 되시고 진리 되시고 생명 되시는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복된 자들이 되길 소망한다.

정준모 목사는 선교신학박사(D.Miss)와 철학박사(Ph. D)이다.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CTS 기독교 텔레비전 공동대표이사, GMS 총재, 총신대학교 개방, 교육 재단이사, 백석대학교대신대학교 교수 역임, GMS(세계선교이사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현 GSM(선한목자 선교회) 고문, 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 담임, 국제개혁신학대학교 박사원 교수, 국제 성경통독아카데미 대표, 콜로라도 타임즈, 뉴스파워, 좋은신문, KCMUSA 칼럼리스트, 대표 저서, ≪칼빈의 교리교육론》,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장로교 정체성》 등 다수가 있다.
정준모 목사는 선교신학박사(D.Miss)와 철학박사(Ph. D)이다. 전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CTS 기독교 텔레비전 공동대표이사, GMS 총재, 총신대학교 개방, 교육 재단이사, 백석대학교대신대학교 교수 역임, GMS(세계선교이사회) 총재 등을 역임했다.현 GSM(선한목자 선교회) 고문, 콜로라도 말씀제일교회 담임, 국제개혁신학대학교 박사원 교수, 국제 성경통독아카데미 대표, 콜로라도 타임즈, 뉴스파워, 좋은신문, KCMUSA 칼럼리스트, 대표 저서, ≪칼빈의 교리교육론》, ≪개혁신학과 WCC 에큐메니즘》, 《장로교 정체성》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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