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부쩍 한국교회 속에 간증 집회 컨퍼런스가 많아졌다. 그리고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위기임을 말해주는 것으로 다시 신앙으로 회복하게 하는 한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본다. 유익한 점도 있지만 조심해야 할 점도 많다. 좀 더 숙고하는 의미에서 바른 방향을 위한 성경적인 제안을 제시한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위험스러운 요소는 처음을 붙잡고 끝까지 가지 못하고 변질된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본질을 잡고 가다가 갈수록 본질 보다는 그것이 주는 선물에 더 마음이 끌리는데 있다. 그러다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은 곧 하나님이라고 착각을 한다. 주님을 만났기에 기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기쁨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는다. 은혜를 받기 위해 주님을 찾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다가 은혜가 안 되고 기쁨이 안생기면 주님을 멀리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평강과 가쁨과 은혜를 얻는 도구가 되는 순간 주님은 주변으로 밀려나게 된다. 평강과 기쁨과 은혜는 주님을 만나면서 주어지는 뜻하지 않는 선물이다. 신앙생활이 나를 위한 도구가 되면 그것은 종교요 우상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이삭을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그 후에 하나님은 선물로 주신 이삭을 바치라고 했다. 그것은 이삭이 하나님 보다 더 우선이 될 수 있는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주시는 보이는 물질적인 복과 체험은 결국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인간은 보이는 체험을 하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하나님 자신을 바라보라는 표징이다. 그런데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보려하기 보다는 계속적으로 보이는 표적을 구한다. 신앙의 종착역은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직 예수만 남는 것이고 그것에 만족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따라가는 삶이다. 신앙의 연륜이 있음에도 여전히 화려하고 자극적인 보이는 현상이 우리의 신앙의 중심이 되면 지금 본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 기적이 없다. 나를 위한 어떤 것도 없다. 오히려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내가 죽는 것이 전부다. 그럴 때 주님이 주님이 되신다.
십자가는 나의 목적을 이용하는 도구가 아닌 나의 목적을 죽이는 현장이요 옛사람이 주님과 같이 죽고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출발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평강과 기쁨을 얻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려고 하지 않고 우리의 기쁨을 위해 주를 이용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평강과 기쁨은 신앙생활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들을 목적으로 삼으려고 노력한다. 신앙의 종착역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다. 진짜 죽어야 할 사람은 죄인 된 나 자신이다. 내가 죽을 때 주시는 기쁨이 영원한 것이다.
자기를 죽이는 한 방법으로 교회가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간증이 있다. 간증은 말씀으로 죽은 자들의 증언이다. 이런 간증은 복음전하는 도구가 된다. 하지만 간증의 위험성이 있다. 간증을 하다 보면 믿음의 분량을 넘어 그이상의 생각을 품을 수 있다 간증자로 세워진 것 자체가 자기를 살리는 도구가 될수 있기에 자칫 간증이 자랑 거리가 될 수 있다.
간증은 본질적으로 자고하기 쉬운 특징을 갖고 있다. 이것은 듣는 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간증은 기도를 많이 하고 해야 하는 일이고 이것이 연례행사가 되면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수 있다. 바울이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자기를 숨기고 무명으로 잠깐 맛보기 간증으로 멈춘 이유도 여기에 있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병에서 고침 받은 일을 자랑하고 간증하다가 분량을 넘어 나라를 패망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특히 보이는 화려한 무대에서 전하는 무대의 간증을 조심하라. 반복되는 간증자들의 간증은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무디게 할 수 있다. 순수한 말씀을 통해서 죽지 않으면 진정으로 죽는 것이 아니다. 자칫 간증이 우리를 죽게 하기보다 우리를 살리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유명한 인사들의 간증에 은혜를 받는가? 무명의 작은 자들의 간증에 은혜를 받는가? 왜 간증은 잘 알려진 사람을 선호하는가? 사람들은 거기에 숨은 함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 왜 당신은 유명한 사람들의 간증에 더 귀를 기울이는가? 왜 간증 집회를 여는가? 그 목적을 안다면 대략 답이 나온다.
간증을 검증할 수 있는가? 그 하나님이 정말 우리가 듣고 싶었던 하나님의 음성인가? 아니면 내 마음의 소리는 아닌가? 그것을 구별하기는 매우 어렵다.
한국 교회가 어느 순간부터 간증이 유행처럼 번지는 교회 행사가 되었다. 말씀 속에서 들려지는 수많은 간증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검증된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런 간증에는 무덤덤한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가?
말씀을 위한 간증이 되어야지. 성경 한절 읽고 하는 간증을 위한 말씀이 되면 안 된다. 바람직한 것은 간증으로만 전해지는 간증보다는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말씀을 말씀되기 위한 도구로서 간증이 되어야 한다.
모세가 자기가 겪은 간증을 말씀을 전하면서 회고로 전하는 신명기처럼,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증거로서 간증이 된다.
가장 좋은 간증은 말씀을 통해서 일어나는 변화의 간증이다. 이것은 말씀을 통해 변화되는 것으로 말씀이 간증의 목표가 되기에 자기 자랑이 되는 것은 어렵다
간증은 2차 자료다. 성경으로 감동이 부족한 불순물이 섞인 말씀으로 변질될 수 있다. 사전 검토도 없고 원고도 없이 전하는 간증은 다시 생각해야 한다. 공동체 속에서 지체가 전하는 간증은 어느 정도 신뢰가 된다. 하지만 함께하는 공동체가 아닌 다른 유명 인사의 간증은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 많은 조회수를 올리는 유명 인사의 간증의 위험성은 자칫 나를 드러내기 쉽다
신앙은 얼마나 나를 죽이는가가 관건이다. 신앙은 정교하게 계획된 이벤트가 아니다. 신앙은 예기치 않은 가운데 일어나는 자기를 산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다.
나를 죽이는 간증인가?
나를 살리는 간증인가?
혹시 간증을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내가 살아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간증을 듣고 난 뒤에 십자가의 길을 가진 오직 예수만 선명히 보이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