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것만 보지 말고 아픔도 보아라
감성, 긍휼, 사랑. 인간으로서, 지도자의 덕목으로 이것만큼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을 확보하지 못하면 어떤 공동체에서도 신뢰와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긍휼은 사랑을 보는 힘이다. 긍휼은 온유인의 속성이다. 긍휼은 메마른 대지 위에 스며드는 생수의 빗방울이다. 불쌍한 마음을 채워주는 것이 긍휼이다.
이 시대 리더에게 꼭 필요한 것은 비판의 리더십이 아니라 긍휼의 리더십이다. 섬김까지는 못하더라도 존중과 배려, 이해와 격려만큼은 교양인이 걸어야 할 근본이다. 우리가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고 뜻을 기리는 것은 그분들의 업적이 뛰어난 점도 있겠지만, 백성을 향한 뜨거운 기운과 애끓는 긍휼의 지도력이 백성들의 허실한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긍휼이란 아픈 상처를 싸매어 주고, 허물을 덮어주며 함께 울어주는 상태를 긍휼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 인생을 살아가면서 옳은 것만 보지 말고 아픔도 보아라.
∙ 법만 보지 말고 처지도 보길 바란다.
∙ 원칙에서 벗어난 것만 보지 말고 수고의 땀도 보아라.
∙ 긍휼은 남을 세워주는 힘이다.
∙ 결과만 보지 말고 과정을 보길 바란다.
그래야 전체가 보인다. 나무가 모여 숲을 이루고, 숲이 모여 산을 만든다.
썩은 나무 몇 그루 보고 산이 죽었다고 판단하지 마라.
전체가 보여야 구석이 보인다. 긍휼은 보이지 않는 곳을 보이게 하는 부드러운 시선이다. 언저리를 모르면 형식에 끝난다.
긍휼의 뿌리는 감성
긍휼을 공부하기 전에 감성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감성의 뿌리에서 긍휼의 열매가 열리기 때문이다. 나의 어머니에게는 친자매처럼 지내는 친한 친구 두 분이 계셨다. 수자 어머니와 갑식이 어머니시다. 아랫동네에는 수자 어머니가 사셨고 윗동네에는 갑식이 어머니가 사셨는데, 이분들 때문에 우리 집 분위기가 냉기류와 온기류가 교차할 때가 많았다. 수자 어머니 집에서 놀고 오시는 날은 어머니 기분이 최고였다. 그냥 해피였다. 수자 어머니의 덕스러운 말 때문에 그렇다. “오째(다섯째 아들) 어머니(나의 어머니)는 늙지도 않아요. 나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 어쩜 그렇게 새색시 같데요. 아들들도 우리 여산동네 아이들 안 같아요. 아들들이 아부지 닮아서 인텔리 같아요. 아들들만 봐도 오째 어머니는 밥 안 먹어도 배부르겠어요. 인물 좋겠다. 공부 잘하겠다. 효성도 많고, 딸 둘에 아들 다섯이니 잘 두셨어요. 하늘에서 칠남매 정해주신 거예요.”
사실 수자네 가족은 딸 둘에 아들이 여섯이었다. 막내아들 이름이 육봉이었다. 그런데 아들 여섯은 너무 많고 다섯이 딱 좋단다. 오째 어머니는 복이 터졌다고 칭찬만 하셨다. 이렇게 수자네 집에서 겨울 밤 긴 시간 마실 갔다 오시는 날의 나의 어머니 얼굴이 어떠시겠나? 개선장군처럼 씩씩하셨다. 나의 어머니 형제는 1남 1녀였거든요 그러니 얼마나 당신이 자랑스럽고 위대 하셨겠어요? 그래서 나의 아버지하고 대화중에 보면 가끔 어깨에 힘을 주실 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갑식이 어머니 만나고 오시는 날은 우리 집 대문 잠그는 소리부터 달랐다. 그러는 날은 나의 아버지는 “갑식이 집 갔다 오구먼” 그냥 아시는 거였다. 며칠 동안 나의 어머니는 “자식이 원수여, 아들들이 원수여, 장가가면 즈그 각시 좋은 일 시키재. 나는 무슨 복이 많아 아들이 다섯이나 되가지고, 네 명이 좋은데, 끝에 두 명은 안 생겼어야 했는데” 불만 아닌 불만을 혼자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갑식이 집에는 놀러 못 가게 금지령을 내리신 적도 있었다.
수자 어머니는 당신의 자식 흉, 남편 흉은 물론, 동네사람들의 흉도 단 한 번도 보신 적이 없었다고 한다. 수자네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난만 조금 면할 정도로 논밭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군대 제대 후에 들으니, 알부자(튼튼한 부자)로 소문 나 있었다.
감성과 원성
갑식이네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에게 들어보니 어느 날 밤 봇짐을 싸서 서울로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 수자어머니는 이해의 감성이 풍성하셨고
∙ 갑식이 어머니는 원성이 풍부하셨다.
∙ 감성의 뿌리에서 긍휼의 열매가 열리고,
∙ 원성의 뿌리에서 비판과 부정의 열매가 열린다.
원성이 꽉 차 있는 사람은 불평불만부터 시작한다. 얼굴은 항상 벌레 씹은 얼굴처럼 씁쓰레한 표정이다. 말 한마디에도 독기가 흐른다. 남들로부터도 원성의 소리를 듣는다.
감성이 풍성한 사람은 감탄, 감격, 감동부터 먼저 한다. 감사와 기쁨이 차고 넘친다. 말에 복이 듬뿍듬뿍 들어 있다. 남들로부터도 탄복이 쏟아져 나온다. 수자 어머니와 갑식이 어머니는 우리 집에 대하여 잘 아시는 분이다. 그럼에도 우리 집의 똑같은 환경을 보고 두 분의 생각과 평가는 이처럼 관점과 느낌이 서로 달랐다.
눈은 관계의 틀을 결정하는 소통의 출발점
‘눈은 관계의 틀을 결정하는 소통의 출발점’이다. 눈에서 태도와 인격이 다듬어진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수자 어머니와 같은 덕스러운 사람을 자주 만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갑식이 어머니같은 부정적인 눈과 부정의 말을 사용하는 사람을 만난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부정어들을 너무 많이 사용하여 상처와 좌절을 키우고 있다. 이러한 부정어, 부정 문장이 들어 있는 언어를 사용하면 결국에는 자기의 중심은 무너지고 소망은 소멸되고 만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이미 악마의 손에서 허우적거리며 좌절의 큰 웅덩이를 파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감사와 불평을 결정한다. 감성 하면 또 떠오르는 대조되는 단어가 있다. 어떤 단어가 있을까요? 이성과 논리다. 이성은 머리로 해석한 것을 말하고 감성은 가슴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멋진 온유인으로 성장하려면 이성과 감성으로 균형을 잡고 영성으로 다듬어져야 한다.
사람은 위로와 사기를 먹고 성장한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좋은 것 보고 좋은 말 하면 감성은 나오게 되어 있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감성의 물줄기는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그 결과물이 목소리와 얼굴을 가꾸어 나간다. 나는 오랫동안 목소리를 연구해 왔다. 목소리는 한 사람의 인생 과정을 담은 그릇이다. 40대 이상은 자기의 행적을 음성에 담아 가고 있다. 그것을 ‘목소리의 나이테’라고 한다.
이해의 감성은 상대를 기대게 하는 이해의 언덕을 만들어간다.
∙ 나무는 무얼 먹고 자라나?
-> 햇빛과 물을 먹고 자란다.
∙ 사람은 무얼 먹고 인물이 되나?
-> 위로와 사기를 먹고 성장한다.
이해의 감성이 있어야 긍휼을 만든다. 그럼 감성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기쁨과 감사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기도에서 나옵니다. 긍휼의 지도자는 사람을 키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