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 목사는 언어의 유형을 언어 I 은 친밀함과 관계의 언어, 언어 Ⅱ는 정보의 언어, 언어 Ⅲ 은 자극의 언어, 이렇게 3가지로 구분하면서, 오늘 현대 사회 속에서 언어 Ⅱ와 언어 Ⅲ은 차고 넘치지만 언어 I은 갈수록 그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했다.
필자의 연구 자료에 의하면 (2005년) 한국의 목회자 85% 정도가 감성 설교보다는 강압적이고 메마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혼자 가는 설교 90%, 거친 설교 81%, 이러한 결과는 본래 목회자가 사랑과 감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성도에 대한 관계의 틀을 잘못 조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설교 커뮤니케이션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마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양한 계층을 만나면서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조절해 나가셨다. 누구와도 막힘없는 소통을 하셨다. 모두를 사랑의 관계로 본 것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쉽게 사용하고 있는 단어 중 하나가 커뮤니케이션이란 용어이다. 대학과 직장과 교회, 그리고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언어적 소통이란 의미로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하고 있다. 물론 커뮤니케이션의 개념에 대해서도 국내외 학자들마다 그 견해와 해석이 다양하다. 그만큼 커뮤니케이션의 범위가 광범위해서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론적 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커뮤니케이션이란 ‘관계의 틀’ 이라고 정의한바 있다.
목회자가 성도를 어떤 대상으로 보느냐에 따라 관계의 틀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언어의 품격도 동반되게 된다. 여기서부터 설교는 준비되어지는 것이며 성도의 삶의 방향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 예수님이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대망을 부여하는 폭탄선언 내용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4:19,막1:17)
예수님은 그들 안에 담겨 있는 큰 비전을 뽑아낸 것이다. 이것이 관계의 틀이다. 국내 500만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를 향해 말씀하고자 하는 그 메시지를 갈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회자는 놓쳐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성도가 자신들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목적을 찾아가도록 역할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계를 어떤 틀로 맺어 놓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을 때만이 올바른 관계의 틀을 구성 할 수 있다.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깨달았을 때 내가 달려갈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행20:24).
목회자가 관계의 틀을 바르게 인식할 때 하나님이 의도하신 설교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성도는 가르침의 대상이 아니다.
유진 피터슨은 자신의 긴 목회 사역 가운데서 예배의 언어, 치유의 언어. 친밀감의 언어에 더 깊이 정착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면서, “나는 상당히 훌륭한 철저히 세속화된 학교 교육과 물질주의에 젖어든 사회에서 배운 내용을 교회 안에서 그대로 재현하는 설명가에 불가했다” 고 술회한 바 있다. 관계의 틀은 일순간에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깊은 생각과 사랑의 언어와 섬김의 행동에서 출발한다.
관계의 틀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관계의 틀은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모양과 색깔이 결정된다. 이제 우리는 이해와 동의와 사랑을 통해서 건강하고 속 깊은 관계의 틀을 이루어 나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