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은 행동을 하는 에너지다. 감정이 없다면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에너지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특별히 힘든 감정을 말했을 때 힘든 감정에 대해 그냥 힘들었다고만 표현하는 사람이 있고, 힘든 감정을 좀 더 세부적으로 나누어서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
심리학자 리사 페드먼 바랫은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를 통해 “유사한 감정들의 차이를 파악해내는 능력을 ‘감정적 과립상’이라고 부른다”며 “감정적 과립상이 뛰어난 사람은 유사한 의미와 비슷한 수준의 자극을 일으키는 감정 사이의 차이점을 잘 분별해낸다”고 했다.
같은 상황과 사건이 벌어졌을 때 감정에 대해 단순히 “기분이 나쁘다”, “기분이 좋다”, “기분이 힘들다”고 표현하는 사람과 자신의 감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어서 표현할 수 있는 사람과는 행복여부에 굉장히 차이가 있다.
감정과립상이 발달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단순히 ‘좋다’, ‘힘들다’ 정도로만 표현하지 않는다. 이는 감정과립상이 발달된 사람이 정신건강이 좋을 뿐만 아니라 힘들고 슬픈 감정이 경험될 때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람들은 감정을 세부적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크게 생각을 못 하는 것 같다. 사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감정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돌봄을 받아본 경험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자신도 감정의 소중함에 대해서 실감을 못하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다.
감정을 느끼고 그리고 세부적으로 표현해보는 작업 즉, ‘감정적 과립상’을 발달시키기 위한 것은 자존감을 건강하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적 과립상이 발달한 사람은 화가 났을 때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고 감정의 기복이 낮은 일관성 있는 내적 능력이 발달되어 있다. 즉 감정적 과립상이 발달된 사람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감정을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세리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다. 세리는 키가 작아 여러 군중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보시지 못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의 간절함과 열정이 뽕나무까지 올라가게 된 행동이 출발이 되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보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를 뽕나무 아래에 내려오라고 하신다. 그리고 내려온 자리에서 구원이 임하였다고 말씀하신다.
삭개오가 내려온 자리는 단순하게 뽕나무 아래가 아니다. 예수님은 올라가고자 하는 삭개오의 열정 아래에 숨겨진 감정들을 만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뽕나무 아래에 내려온 삭개오에게 “너와 네 가정에 구원이 임했다”고 말씀하셨다.
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바렛은 “감정적 과립상이 발달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웰빙을 누릴 가능성이 높고, 인생을 살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도전들을 처리할 때 뇌가 보다 정밀하고 정확하게 해결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인생이라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없을 수 없다. 그리고 불확실한 상황을 대처해가면서 인생의 아름다운 조각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감정이 조절이 잘 안 돼서 직설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 한다거나, 한번 화가 나면 흥분도가 가라앉지 않아서 관계적 갈등의 골이 매우 깊어지게 행동하게 된다면, 그리고 확실한 상황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시작도 하지 않는다면 성장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것이 결과로만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 않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갖고 있어도 가족들과 일상이 무너진다면 과연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목표만 성취할 줄만 알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소소한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도 없다고 한다면 정말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앙생활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아래에 내려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구원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정작 신앙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느끼는 감정에 대해선 더더욱 외면한다면 감정적 과립상이 발달할 수 없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기 자신을 외면하고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크게 누리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 앞에 자신의 생각과 상태를 세밀하게 나누며 불안한 마음을 내어 놓고 기도한다면 덮어놓고 필요를 구하거나 해결책만을 간구하는 것보다 훨씬 내 안에 평안과 행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나의 감정적 과립상을 발달시켜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