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비데라카이오) 걷는 자마다(콜 예레 아도나이 하호레크 아도나이) 복이 있도다(아쉐레)”(시128:1).
오늘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변화의 틀이 크고 어려운 삶 속에서 생존의 위기를 극복하려하며 그 삶의 비결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다. 오늘의 세계와 세상이 빠르게 변화되는 삶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에 적응하며 생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답은 성경에 있고 그 중에 구약의 복음이며 가장 우리의 감동을 주며 지혜와 생명의 말씀(레마)를 주는 시편에서 답을 얻고자 한다. 시편은 ‘영혼의 해부학’이라 하며 우리 삶의 나침반을 보여주는 생명의 내비게이션과 같은 책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가베르 예레 아도나이) 이같이(키 켄) 복을 얻으리로다(예보라크)”(4절). 이 시편 128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시120-134)로서 예루살렘(120-124편)-성전(125-129편)-다윗(130-134편)이 중심이 된 주제로 구성된다. 여호와의 복이 그의 영원한 거처인 시온(예루살렘)에서 흘러 나온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미찌온)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예바레케카). 너는 평생에(콜 예메 하예이카)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우레에 베투브 예루샤람)”(시124:5).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삶,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축복의 비결인 것을 말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없는 삶은 헛된 삶이라는 것을 말하며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시편들은 말하고 있다.
시편 128편 기자는 축복의 모습을 ‘이같이’(켄) 복을 받는다고 하며 가정의 축복을 제시한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예기아 카페이카) 먹을 것이라(키 토켈) 네가 복되고(하쉐레이카) 형통하리로다(웨토브 라크)”(2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수고하고 일한대로 먹을 것이고 기회 손실이 없으며 만사형통의 복을 가지게 된다고 말한다. 축복, 형통, 보기에 좋은 삶이 우리의 삶 속에서 매일 펼쳐질 수 있을까. 오늘은 팬데믹 위기의 시대, 하나님 심판의 시대인데, 과연 생존하고 지금의 일상을 유지하고 또 번영하고 번성할 수 있을까? “네 집 안방에 있는(베테카) 네 아내는(에쉐테카)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케게펜 포리야) 네 식탁에(레슐하네카) 둘러앉은 자식들은(바네이카...사비브)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키쉐티레 제팀)”(시128:3). 이처럼 아름다운 가정을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로서 묘사하며, 이스라엘의 축복상징어로 표현해준다. 가정 식탁에 둘러앉은 사랑스런 어린 자식들이 감람나무 같다고 하며 식탁 하브루타에서 행복을 먹고, 밥상머리 교육이 이뤄지며 하나님의 교육이 이뤄지는 공간임을 보여준다. 더나아가 시편기자는 대대로 축복받게 됨을 보여준다. “네 자식의 자식을(바님 레바네이카) 볼지어다(우레에)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샬롬 알 이스라엘)”(시128:6).
이러한 축복의 가정 모습을 잘 보여주는 가정이 선교사의 가정일 것이다. 추양 한경직을 양육한 방위량(William N. Blair, 1876-1979) 선교사는 처음에 두 번의 한국 선교 요청을 거절하려고 하였다. 평양 선교사 스왈른이 모교인 맥코믹 신학교를 찾아와서 간절히 호소하였을 때 조선의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여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날 저녁에 스왈른 선교사가 다시 찾아와서 히브리어 과목에 낙제하였느냐? 물으면서 자신은 히브리어 과목에서 낙제했어도 선교사로 갔는데, 낙제하지 않는 블레어는 갈 수 있지 않냐고 요청하였다. 핑계거리를 찾으려고 약혼녀에게 편지를 하여 “나와 함께 한국에 갈 생각이 있다면 언제라도 떠나겠소.” 그러나 그는 내심 싫다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답이었다. “정말 기뻐요. 나는 당신이 기꺼이 가기를 바랐어요.”
블레어(방위량)의 선교 지역은 평양 북쪽 지역인 영유, 안주 등 다섯 개 마을이었다. 그의 어학 선생 이채수는 성령 충만한 사람으로서 하루 두 차례 수업에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기도합시다’로 시작한 말배우기는 이제 한국어로 설교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는 시장을 중심으로 5일장 서는 날, 20여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한국말을 하는 선교사를 본 조선인은 질문을 하며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전도여행 동안 주막에서 머물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중 교회당이 40개가 세워지게 되어 그 교구를 돌아보는데 두 달이 걸렸다.
천국 가정이 세워지고 성도수가 4000명이 넘게 되었다. 영유에서는 주일 오후 예배가 7백명이 모였고 방에 여자들만 들어가고 남자들은 밖에서 돗자리에 앉게 되었다. 남산 마루교회, 안주(마펫 선교사 사역지)등을 목회, 선교하면서 세례와 성만찬을 거행하였다. 1904년 러일 전쟁 때에 블레어 선교사는 서울에 갇혀 평양에 올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에 과부 최씨가 집을 헌물하여 교회 예배당이 되었는데 같이 살던 과부 천씨가 마귀에 들려 협박과 저주를 퍼부으며 어렵게 했다. 하지만 나중 회개하고 소천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 후 안주교회가 계속 성장함에 따라 큰 예배당이 필요했고 성도들이 헌금하여 1200명이 앉을 수 있는 교회가 세워졌다.
블레어는 교회 설립 뿐 아니라 평양숭실전문학교 운영을 맡으면서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 남자 사경회에서 영적 대각성의 불길을 점화하였다. 그는 위대한 부흥의 시대를 이끌면서 1894년 1천 명 교인수가 20만 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는 42년이 넘는 세월을 한국 교회와 함께 하면서 유일하게 살아있는 증인이 되었다. 딸 셋과 아들 하나의 가장으로서 나중 사위 한부선(브루스 헌트) 선교사와 함께 선교를 한다. 선교의 가정이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사도행전의 성령충만의 역사와 같았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이러한 선교의 형통이 이뤄져 복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