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교수의 구약이야기 (299) - 구약성경과 선교이야기 (111)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고라 자손의 마스길(교훈),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하나님이여 사슴이(케아얄)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타아로그 알 아피퀘 마임)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42:1).

세상 정부는 마스크 해제를 선포하고 나서서 코로나 19 전염병에서 이제 벗어난 것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전염병의 복병은 아직도 우리를 위협하고 있고 팬데믹이 가져온 여파로 여전히 고통 중에 있다. 시편 42편 기자는 이러한 탄식의 상황을 실제적(리얼)으로 잘 묘사하고 있어서 탄식시들의 대표적인 시편이라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아예 엘로헤이카)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하에타 리 디메아티 레헴 요맘 와라에라)”(42:3). 시편은 인간 영혼의 깊은 데서부터 울부짖는 외침이라고 말한다(Out of Depth, 앤더슨). 인간의 무의식과 잠재의식 속에서 깊이 침잠해 있던 것이, 인간 존재의 내면세계에서부터 하나님에게로 탄식하면서 간구하는 기도를 시편이 보여준다.

시편 제 2(42-72)을 시작하는 시편인 이 42편은 심각한 인간 실존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데, 엄청난 탄식의 상태를 기자가 표현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마 티쉐토하히 나프쉬) 어찌하여 내 속에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호히리 리로힘)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예슈오트 파나이오)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키 오드 오데누)”(42:5). 시편기자는 자신의 영혼과 대화하듯, 마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대화를 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왜 낙심하고 불안해하고 힘들어 하느냐라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한다. 시편기자는 이러한 탄식과 갈등 속에서, 고난의 상황이 지속되더라도 하나님을 만나면 해결되리라는 사실과 확신을 고백한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레로힘 레엘 하이)을 갈망하나니(짜메아 나프쉬)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마타이 아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웨에라에 페네 엘로힘)”(42:2).

신앙 공동체 안에서 갈등함과 공동체의 평화보존문제, 또 위협세력과 대적자 문제는 시편 탄식시의 중심이슈로 나타난다(2,4,6,7). 이 중에서 대적자의 공격은 너무나 예리한 칼처럼 시편기자를 힘들게 한다고 고백한다. “내 뼈를 찌르는 칼같이(베레짜하 베아쯔모타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콜 하욤)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10),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레엘 살레이)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라마 쉐카흐타니)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라마 코데르 엘레크)”(9).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테홈 엘 테홈)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콜 미쉐바레이카 웨갈레이카) 나를 휩쓸었나이다”(7). 여기서 신앙 공동체를 위협하는 혼돈의 세력인 깊은 바다, 파도와 물결이 시편기자를 엄몰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오늘 우리의 대적이 공격하는 상태가 이러한 깊은 탄식의 상태를 가져오게 했다. 이러한 상태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주님 앞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을 본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마 티쉬토하히 나프쉬)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호히리 레로힘)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

 

이러한 시편의 노래를 잘하는 분이 선교사이다. 황해도 선교의 아버지인 한위렴(William Hunt, 1869-1953)선교사는 재령 선교의 산파역할을 하였다. 한국 선교를 대를 이어 한 선교 명문 가문이 언더우드, 린튼 선교사 가정이라면 이와 더불어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 헌트가문이다. 아들 한부선 선교사와 더불어 한국 신학교육과 선교의 기초를 놓았다. 한위렴 선교사는 1620년 청교도 신앙을 가지고 미국에 이주했던 메이플라워호의 신대륙의 청교도 후손이었다. 그는 1897년 한국 파송선교사로 평양에 거주하면서 재령 선교부를 개척하였다. 또한 더불어 마펫(마포삼열)선교사가 1893년 재령 지역 최초의 교회인 신환포교회를 설립했고, 한치순이 재령에 살면서 평양에 가서 복음을 듣고 내려와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 교회를 한위렴 선교사가 와서 신앙 교육을 하였던 것이다.

한위렴은 네비우스 선교방법(자진 전도, 자력운동, 자주치리)으로 신약 교회 전도원리를 적용하며 한국 교회의 자립 형태 모델을 세우게 하였다. 그는 1906년 재령에 공식적인 재령 선교지부를 설치하였고 재령읍에 예배당을 새로 건축하고 인근 지역 전도, 권서인들과 함께 성경과 전도지를 들고 가가호호 전도하였다.

1937년 재령 남자성경학교 교사들(첫째 줄 우측 한위렴 선교사) / 이미지출처 : 평양대부흥 홈페이지
1937년 재령 남자성경학교 교사들(첫째 줄 우측 한위렴 선교사) / 이미지출처 : 평양대부흥 홈페이지

재령은 황해도 지역 교회 부흥과 사경회, 성경학교 운동, 명신학교를 통한 인재양성을 하며 북한 선교의 중심지가 되고 있었다. 1908년 재령 제중병원이 설립되어 파이팅(황호리)선교사가 순회진료와 의료 사업을 활발하게 하였다. 한위렴 선교사의 아내 베르티는 1868년 일리노이주에서 출생하여 일본에서 헌트와 결혼하고 평양에 주재하며 선교 사역을 같이 한다. 그녀는 숭실중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으며, 그 제자가 김인식 선생인데 그는 홍난파와 이상준 같은 음악가를 배출하였다. 선교는 이처럼 인물을 낳고 그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다. 오늘 우리도 이 부르심에 응답하며 축복의 생애를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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