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는 대천성결교회에서 열린 ‘초교파 사명자성회’에 평소에 나라를 위해 애끓는 마음으로 애국하느라 고생하는 친구와 함께 참석하였다. 약 400여 명의 목사님 부부 및 교회 직분자가 모였는데 감사하게도 숙소와 식대 모두를 교회에서 무료로 정성껏 베풀어 주셨다.
벌써 21번째인 이번 성회를 위해 온 교인이 수고하는 모습과 강단에서 흐르는 귀한 말씀에 많은 은혜를 받았다. 새벽기도회와 아침 집회를 12시로 마친 후, 저녁 식사 시간인 6시까지는 서해와 동네를 구경하며 쉬라는 듯 집회가 없었다.
대천에서 목회하셨던 친절한 목사님 한 분이, 친구와 나를 차에 태우고 이곳저곳 구경시켜 주셨다. 나는 가는 곳마다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와~! 우리나라가 언제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해졌을까?” 아마도 내가 마포 연구소에 콕! 박혀 있던 지난 10여 년 동안 이렇게 멋지게 발전했나 보다. 내 기억의 서해는 백사장에 쓰레기만 가득 했었고 물은 더러웠는데…
어머나! 파란 하늘의 갈매기들도 예쁘게 날아다니고 작은 배들과 시원한 바닷물, 그리고 서쪽 수평선으로 넘어가며 그려지는 빨간 노을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작품인 대 장관이며 기쁨이었다. 동네마다 하얗고 깨끗한 모래밭과 바다를 이어놓은 듯한 데크길을 걸을 때는 구름 위를 걷는 듯 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제는 아름다운 바다를 보러 하와이나 LA의 롱비치를 안 가도 되겠구나! 웃으며 생각했다. 아! 그래서 교회마다 청년들 예배가 줄어드는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우리나라를 어찌 하나님께서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 많은 복을 주셨는지 감사해서 눈물이 난다. 시골인데도 불구하고 동네마다 작은 교회, 큰 교회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온다. 아, 바로 저것이구나! 유럽의 어마어마한 교회도, 미주의 크고 아름다운 교회도 교인들이 줄어들어, 운영이 어렵다는 소식을 자주 듣고 있는데 이 작은 대한민국은 이렇게 동네마다 십자가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다!
혹자는, 별안간 우리나라 교회가 빨리 부흥했고 교회가 부자가 되면서, 교역자와 직분자가 많이 타락했다고 속상해한다. 그러나 그런 일들은 옛날 구약시대나 예수님 시대 때나 현시대에도 진행형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니 맘 상하지 말자! 이후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면 그런 꼴을 안 볼테니 살아계신 하나님께 맡기고 하루하루 기뻐하고 감사하자!
교회 안에서 싸움이 일어나든지, 돈과 여자 문제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든지, 교권 쟁탈전에 머리가 터지든, 이렇든 저렇든 우리나라 모든 교회는 새벽기도와 수요예배, 금요예배 및 주일예배를 쉬지 않고 드리니, 여기저기서 찬송과 기도 소리는 끊이지 않는다. 사랑과 진심으로 드리든, 싸움과 욕심으로 드리든, 예배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우리 하나님 아니신가?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잠 1:7)이라고 말씀하신다. ‘경외(fear)’란? 무섭고 두려워 벌벌 떠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키파’(하나님을 한순간도 잊지 않기 위해 쓰는 작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 정통파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은 “너희 죄가 눈과 같이 하얘지게 된다”(사 1:18)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같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보응에 대한 말씀도 읽어 보았는가? (잠 11:31, 욥 34:11, 롬 2:6, 골 3:25, 히2:2) 구약에서는, 죄를 지었을 때 당장에 보응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는? 무조건 용서인가, 아니면 그 죄에 대한 보응이 있었을까?
보응!!
간음하다 예수님 앞으로 끌려온 여인은 어떤 보응을 받았을까? 그녀는 숨어 지켜보던 남자들에게 현장에서 머리채를 잡혀, 옷도 못 입은 채 온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예수님이 계시는 곳까지 끌려왔다.(요 8장)
둘째 아들, 탕자는 어떠했을까? 그가 아버지 품에 안기기 전, 어떤 보응을 받았을까? 그는 모든 재물을 다 잃고, 죽을 정도로 배가 고팠기에 더럽고 냄새나는 돼지우리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사람도 없었다!”고(눅 15:16)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가 얼마 동안 돼지우리에 머물렀는지는 모르지만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한 예수님 우편에 달렸던 강도는 어떤 보응을 받았을까? 그는 십자가에 달리는 심한 고통을 당하며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다 치르고 예수님과 함께 낙원이 들어갔다.
아, 우리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는구나! 하나님은 너무나 거룩하시므로, 우리의 죄를 그냥 용서하실 수 없다. 언제나 그에 대한 대가를 물으시는 것을... 예수님의 보혈로 나를 사랑하시고 용서하시지만, 죄에 대해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우리 교회와 가정이 얼마나 기쁨으로 행복하고 거룩으로 가득 찰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