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이다(웨아시하 베후케이카)”(시119:48).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삶의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은 그것의 본질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부터 파악될 수 있기에 하나님에게 가서 그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국가와 민족의 문제도 바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에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람이 바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 묻고 그 문제의 해결을 찾고 있다. 시편은 이처럼 주의 법을 말한다.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헤베레 레샤임 이웨두니 토라트카 로 샤카헤티)”(시119:61).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자레아파 아하자트니 메레샤임 오즈베 토라테카)”(시119:53). “또 왕들 앞에서 주의 교훈들을 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겠사오며(와아다베라 베에도테이카 네게드 메라킴 웨로 에보쉬)”(시119:46).
시편 119편은 시편 제5권(시 107-150편)에 속한 시편으로서 할렐루야 시 모음집에 해당한다. 이 5권은 감사에서 찬양으로 가는 여정을 보이며 감사에서 시작하여 찬양으로 끝나는 구조를 보인다(시137편). 시편 118-135편은 야웨를 경외하는 자들이 성전에 순례하는 과정을 소개한다. 이 중에 표제어가 다윗의 시(시 122, 124, 131-134편)나 솔로몬의 노래(127편),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120-134)로 시작한다. 시편 119편은 시온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그 순례자의 마음 자세와 그 중심에는 토라(율법)가 있음을 가르쳐 준다. 이 시편 119편은 기도시로서 토라의 암송을 위한 알파벳 시로서, 지혜시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때에 순례절기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하나님에게 가는 길은 바로 토라의 길임을 알려준다. 이 토라 시편이 전체 시편의 중심에서 말씀이 육신이 된 로고스(진리, 길, 생명)의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리는 전주곡과 같은 시편이 된다. 이는 시온의 노래로서, 영적인 천성, 천국에 가는 길에 말씀과 기도의 노래가 중심임을 시사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호레니 아도나이 데레크 후케이카 웨에쩨레나 에케브)”(시119:33).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위보우니 하사데카 아도나이 테슈아트카 케이메라테카)”(시119:41).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제코르 다바르 레아브테카 알 아세르 이하레타니)”(시119: 49).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헤레키 아도나이 아마르티 리쉐모르 데바레이카)”(시119: 57). 이 토라 시편 119편은 시편 1편, 19편과 더불어 신뢰와 명상의 시편에 해당하며 신뢰의 노래와 지혜 시편(36, 37, 49, 73, 78, 112, 127, 128, 133편) 등으로 본다(앤더슨). 이 토라 시편은 암송하고 가르치기에 편하지만 제의적 형태나 그 사용과는 거리가 멀다 이 시편은 인생이 복 받고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 바로 지혜, 하나님의 말씀, 율법(토라)에 있음을 강조한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하베르 아니 레콜 아쉐르 예레우카 우레쇼메레 피쿠데이카)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종을 선대하셨나이다”(시119:63-65).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아쉐레 노쩨레 에도타이오 베콜 레브 이드레슈후)”(시119:2).
악인과 교만한 자, 비방, 조롱, 악인들의 줄이 나를 어렵게 하고 고난 속에 살아가게 하고 또한 탐욕과 허탄한 것이 어려운 삶이 되게 하지만 시인은 토라(율례, 주의 법, 말씀, 주의 계명, 법도)와 말씀에 의지하겠다고 한다(시 119: 39, 42, 50, 51, 53, 61, 69; 36, 37). 결국 시인은 말씀으로 인해 감사하겠다고 한다.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하쪼트 라에라 아쿰 레호도트 라크 알 미쉬페테 찌드케카)”(시119: 62). 시인은 더욱 이 세상의 친구가 누구인지 밝힌다.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시119:63). 끝으로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 바로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조트 네하마티 베아네위 키 이메라트카 히야트니)”(시119:50).
이러한 생명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 주의 종, 선지자가 있다. 제임스 게일(J. S. Gale,1863~1937)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조선인 대다수 보다 더욱 이 땅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해박하게 알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1888편 스물다섯 살에 조선에 선교하러 들어왔다. 그는 조선에서 10년을 살며 보면서 1898년 <조선 스케취(Korean Sketch)>라는 책을 출판하여 미국 영국 캐나다에서 출판하였다. 그는 사전이나 천로역정이라는 책을 번역 출판하였을 뿐 아니라 입국하지 7년 만에 우리말에 통달하여, 정동에 살면서 조선 사람과 친밀하게 어울렸다. 그는 사랑방에 앉아서 양반들과 <논어>를 토론하였고 수많은 고전과 조선의 저서들을 읽고 번역하였다.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저술하였고(40여권이 넘는 영어 번역저서), 수 백편의 논문, 기고문을 남긴 대학자이었고 한국학 학자였다. 동국통감을 번역하였고(1895년) 단군 조선에서 고종까지 역사를 집대성하여 4년간 잡지에 연재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원군을 만났고 대원군의 장손이자 고종의 조카인 이준용과 친했고 고종의 아들 의화군과 친구였으며 이범진, 박영호, 이상재 등 수많은 관리들과 친밀했다
이승만의 미국 유학 추천장을 써주기도 했고 청일 전쟁의 현장에 있으면서 고종의 고문이 되어 도왔다. 무엇보다 명성왕후 시해되던 날, 그는 고종을 알현했다. 그가 쓴 조선에 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은 실로 동양의 희랍(그리스)이라고 말하고픈 나라로, 일찍이 고대 유사 이래 온갖 문화를 창조했으며, 세계에서 으뜸가는 바가 있었다. 우선 문학의 측면에서 보자면 서양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익스피어는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조선으로 말하자면 임진란 이후의 인물이지만 조선에는 이미 그보다도 1000여 년 전 신라 최고운(최치원)의 문학이 당나라에 들어와 측천무후를 놀라게 하지 않았느냐? 고구려 광개토왕 비문과 같은 것은 그 웅도거업(雄圖巨業)은 접어두더라도, 단순히 문장 그것만 놓고 보더라도 최고의 걸작이며 게다가 그것은 실로 기원후 414년이라는 고대의 것에 속한다. 그 사상과, 그 문물제도에서 보아도 조선과 같이 발달한 곳은 없었다.”
1900년 서울 종로 5가에 연못골교회, 연동교회 담임 전도자일 때, 선교사 게일은 양반과 상민, 천민 구분 없이 교회에 다니도록 하였다. 신분의 차별을 교회에서 없앤 것이다. 1904년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천민 출신 이명혁을 교회에 장로로 임명했다. 뒤이어 광대였던 임공진을 장로로 추대하려고 하자 양반 시도들이 거세게 반발하여 연동교회를 떠나 묘동교회를 따로 개척하기도 했다. 이상재, 이승만, 이원긍, 유성준, 안국선 김린 등이 독립협회 활동으로 옥고를 치른 양반 출신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조선인 관리들이 연동교회에 입교한 것도 역사적으로 의의가 크다. 제임스 게일은 웅대한 스케일로 조선의 문화 혁명을 일으키며 빛의 나라로 탈바꿈하게 하는 그 원동력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빛은 조선에서 선교사의 기도와 그의 학문과 십자가 선교에서 비롯되어 크게 비추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