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137:1).
폭염이 연일 계속되면서 한반도는 몸살을 앓고 있다. 온난화 현상이 전 세계를 휩쓸면서 기상 이상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일본은 지진과 화산활동으로 온천이 있고 또 연기가 항상 있어서 후쿠오카와 벳부 등은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다. 이 더위에 시원한 피서를 일으킬 수 있는 말씀은 바로 오늘 시편 137편의 말씀의 은혜이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키 샴 쉐에루누 쇼베이누 디브레 쉬르 웨토라레이누 시메하 쉬루 라누 미쉬르 찌온)”(시137:2-3). 이 시편은 바벨론 포로의 상황을 잘 묘사한 노래로서 알려져 있는 인물이 다흐슈타인(Dachstein, 1487-1553)이다.
이 사람의 잘 알려진 찬양시의 모델로서 위대한 시적인 힘과 능력을 보여준다. 포로에서 예루살렘 파괴(주전 587)와 정복의 아픔을 겪으면서 그 고통과 상한 심령을 보여준다. 바벨론 포로의 짐과 그들의 본토 귀환의 바람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 도시에 향수와 그들의 마음에 간절한 향수의 마음, 그 감정의 강렬한 그리움을 주고 있는 시이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 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티드바크 레쇼내 레히키 임 로 에즈케레키 임 로 아아레 에트 예루샬람 알 로쉬 심메하티)”(시137:5-6).
시인은 멜랑콜리의 감정으로 향수적 회의감을 가지고 바벨론에서 애도하는 시간에 수집된 시이다. 바벨론 통치자의 노래를 불러달라는 요청을 겪으면서 거룩한 종교적 애국적 감정을 표현한다. 또 상한 심령을 시로 정화하며 동족의 신앙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더우기 적들의 노래의 요청이나 조롱을 감내하며 그 감정을 억제하면서 그 증오심을 숨기고 주재할 수 없는 분노심을 숨기며 예루살렘의 회복을 꿈꾸는 모습이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은 자가 복이 있으리리로다(바트 바벨 하쉐두다 아쉐레 쉐예샤렘 라크 에트 게무레크 세가마레트 라누)”(시137:7-8).
바벨론 멸망과 바벨론 포로 생활의 슬픈 현실과 그 역사를 회고하면서 시인은 역사적 회복과 비전을 담고 어려운 고난의 현실을 자기 정화(카타르시스)심을 가지고 회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끝으로 저주 시편의 결론부는 아주 인상적인 적의 불행한 결말을 이끄는 것으로서 시인의 역설적 구원의 가능성을 맺는 시구로 끝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아쉐레 쉐요헤즈 웨니페쯔 에트 오라라이크 엘 하사라)”(시137:9).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저주시, 적의 나라 아이들에게, 곧 미래의 꿈나무들이 비극적 운명을 맞기를 바라는 저주 시편으로 끝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과 암담한 미래의 비극을 역설적으로 말하며 대적자 나라 아이들의 운명을 이야기함으로써 새로운 희망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 실낱같은 시적 상상력의 표현으로써 비극적 운명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서 붙을지로다(임 에쉐카헤크 예루살람 티쉐카흐 예미니)”(시137:4-5). 이는 거룩한 분노로 이스라엘 사람은 바벨론 사람들의 유흥을 위한 요구에 대해, 그 괴물과 같은 요청을 거절하고 있다. 조롱과 하나님의 영광이 교차되고 있고, 인간의 환경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섞이며, 이 시는 내적인 거짓과 위선 등의 상태를 보여주며 나중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바벨론 포로의 역사를 통해 지극한 슬픔과 고난이 표현된다. 또 하나님의 거룩성과 이방인의 청중들의 역설적 상황에서 죄수의 영혼과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연상하게 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네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마태7:6).
시편 137편 1절은 성전을 축하하는 절기에 역사적 회고를 하며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다. 2-3절은 애도하며 탄식으로 침묵하며 수금을 걸고 슬픔을 노래한다. 또 죄수가 된 심정으로 이방인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시온을 노래한다. 이 시온 시편으로서 시편 46, 48, 84, 122편으로서 이방인의 유흥에 대하여 다룬다. 시편 137: 4절은 여기는 거룩한 분노가 있는 구절로서 굴욕과 하나님의 거룩함, 시온 찬양과 이방인 청중의 유흥 등이 섞이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5-6절은 내적인 감정이 시인의 영혼에서 애국심과 자가당착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가, 1인칭 시인의 입을 통해 시온의 노래를 슬프게 부르며 결국 슬픈 운명을 잊고 기쁨의 시온 회복의 기원을 하면서 이스라엘의 큰 회복과 재건을 하게 된다(6절). 백성의 배신과 그의 조국에 대한 회복을 비는 것으로서 그 제국에서 살고 있지만 적국에 대한 조롱이 담기고 있다. 또 예루살렘의 멸망의 운명이 포로지에서 재현되고 있지만 재건되리라는 시적인 간절한 열망이 반영된다. 7-9절은 시편 기자의 복수의 마름과 고통당하는 시인의 반전을 기대하는 노래이다. 적국은 마지막 결정, 교만한 조롱의 신성 모독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적국 에돔의 운명이 비참하게 이어지고 결국 복수의 분노로 성취되게 되고 예루살렘의 날에 구원받게 된다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게 된다. 결국 바벨론은 망하고 주전 539년 페르시아(바사) 제국의 고레스 왕이 등극하게 된다. 이 시편은 명상적, 역사적 시편으로서 깊은 애국심이 표현되면서 국가와 민족, 개인 역사의 심도 깊은 역사를 보이며 인간 심연의 고뇌를 잘 표출한다. 그리고 이 시는 적에 대한 미움과 증오의 표출과 바벨론에 대한 분노가 잘 드러내었다(렘 29:7; 사 13:16). 시인은 계속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관계를 확신하면서 인간의 감정과 수난을 극복하게 되는 시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비극적 인생을 살면서도 한 나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살아간 선교사가 있다.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 G. Underwood, 1895-1916)는 릴리어스 호튼(1851-1921)과 결혼한다. 1883년 자욱하게 안개 낀 조선의 제물포항으로 배가 천천히 들어온다. 배에서 내린 것은 구두 신은 예쁜 미국 아가씨였다. 처음 제물포 항에 땅을 밟은 릴리어스 양은 조선에 대한 첫 소감을 이렇게 말한다. “열악한 버섯 밭 같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작은 민족과 같다.” 그녀는 광혜 의료원 책임자이자 명성황후의 담당 의사가 되었고, 나증에 호레이스 언더우드와 결혼하여 원한경을 낳는다. 원한경(1890-1951)은 언더우드의 2세로서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큰 도움을 준다. 그는 3.1운동 당시 일본의 제암리 학살 사건 등의 만행을 아내와 함께 세계에 폭로하는 등 활동을 펼친다. 그는 1941년 탄압으로 교장의 자리에서 물러나 외국인 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강제 추방당한다. 1945년 해방 이후 통역관의 자격으로 한국에 다시 돌아와 연희대학교에서 헌신한다. 1950년 한국 전쟁에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던 그는 사랑하는 아들 세 명을 남기고 부산에서 영영 세상을 떠난다.
언더우드 2세 원한경 목사가 별세하자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언더우드 3세 원득한, 원재한, 원일한은 자진해서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원일한 박사는 한국 전 당시 미해군 대위로 정전협정 당시에는 UN군의 수석 통역 장교로 활동한다. 원일한 박사는 1953년 10월 휴전과 함께 제대한 그는 연희전문대학교의 조교수로 취임해, 학교를 복구하는데 힘쓴다. 대학의 이사로 지내며 한국 교육 발전에 헌신한다. 그는 한국을 사랑해서 발전시킨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 인촌 문화상, 한미 우호 협회상, 연문인상 등을 받는다. 그는 한국의 제2 고국으로 여기며 “내 겉은 미국인이지만 몸속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말을 남기고 2004년 별세한다.
언더우드 4세인 원한광(1943-)박사는 역시 대를 이어서 연세대학교 교수, 재단이사 및 한미교육위원단 단장으로 역임하며 30년간 한국 교육과 사회 발전에 공헌한다. 그는 여러 상을 받고 부인 낸시 언더우드(원은혜)도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로 지낸다. 원한광 박사는 한국의 어린이 2명을 입양해 키우면서 선조부터 우리나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다.
언더우드 4세, 피터 언더우드(원한석)는 한국에서 기업 컨설팅 비즈니스를 하며 살면서 “한국 경제를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은 이제 가난해서 글을 깨치지 못한 아이들이 많지 않죠. 다만 한국의 경제가 더욱 성장하고 한국이 세계 리더로 우뚝 설 수 있는 미래를 꿈꾸고 있다. 피터 언더우드는 100년전 증조 할머니, 릴리어스 호튼이 쓴 조선 견문촉의 내용을 소개하며 한국 경제가 발전하기를 바란다. 그는 한국이 아니라 우리나라라고 이야기하며 삼겹살에 소주를 좋아하고 빨리 빨리를 외치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민족성을 소개하며 <퍼스트 무버>라는 책을 통해 한국인의 경제 발전을 기대한다. 이처럼 언더우드 가문은 4, 5대를 이어가면서 한국 사랑과 선교하며 한민족과 한 나라에 동화되어 갔다. 이처럼 선교한다는 것은, 가문이 여러 세대를 통해 동화되어 가는 것임을 오늘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