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은 용서다. 풀고 받아들임이다. 용서 이전의 관계는 맺히고 거부한 불통이다. 소통이면 소통, 불통이면 불통이지 둘 사이에 중간 지대는 없다. “화해는 둘이 필요하지만 용서는 한 사람이면 족하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럴까? 용서의 대상이 없다 함은 용서할 내용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용서는 일방적으로 선언할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 용서받을 대상은 이미 용서자의 마음과 생각에 자리하고 있다. 용서는 반드시 상대를 필요로 한다. 사람이 아니라면 하나님이라도 용서의 자리에 계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용서한다? 신성모독이 아닐까? 하나님도 사람에 의해 용서받는다. 이것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죄인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 문제를 다루면서 욥이 최초에 던진 질문은 용서할 수 없는 하나님께 대한 회의였다. 역사를 섭리하시고 영원한 경륜 속에서 인간의 영혼을 다루시는 하나님을 수용하며 욥은 하나님을 용서하는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임이며, 수긍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예정에 복종함이다. “섬과 섬을 잇는 것은 출렁거리는 바다이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것은 마음이다”는 시구가 있다. 가까운 섬이야 육지로 잇는 연육교를 만들 수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섬들을 잇는 것은 다리가 아니라 출렁이는 바다다. 바다가 없다면 섬은 섬과 연결되지 못한다. 섬과 섬은 바다로 인해 사이가 격해 있는 게 사실인데 시적 상상의 세계에서는 바다 물결이 섬들을 이어준다.
용서의 문제와 연관하여 사람과 사람의 마음은 바다 물결처럼 출렁거린다. 마음의 동요는 용서할 대상이 있다는 반증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출렁임이 있다. 인간의 출렁임이 애증의 갈등임에 반하여 하나님의 출렁임은 오로지 사랑이다. 그것이 차이일 뿐이다. 애증의 출렁임을 에로스, 또는 필리아에 견준다면 사랑의 출렁거림은 아가페일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그릇으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베푼다. 스데반의 용서가 거룩한 것은 그의 용서 행위가 하나님의 용서를 비출 만큼 크고 위대했기 때문이다. 그의 용서는 십자가에서 일방적인 용서로 소통의 길을 여신 주님의 그림자라 부를 만하다.
하나님의 용서든 사람의 용서든 용서를 비웃는 것은 잘못이다. 영성이 반듯하지 못하면 용서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비뚤어진 영성과 왜곡된 영성은 용서를 모른다. 이런 영성이 버젓이 교회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교회의 재앙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용서하시듯 인간도 하나님을 용서함이 없다면 서로가 통하는 소통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용서한다함은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이 처사를 전적으로 수용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야말로 신성모독이요 소통의 원수다. 암세포처럼 번져가는 불통의 영을 부단히 경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