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교회에 사람이 없는가? 셀 수 없이 많다. 사람이 모여들지 않는다고 아우성이지만 모이는 교회에는 여전히 많이 모인다. 회중은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는다. 다양한 배움을 익히고 서로 사귄다. 친교라 불리는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성격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교회마다 친교의 정도에 차이가 많다. 회중의 숫자와 코이노니아는 정비례하는 것일까? 정직하게 말하자면 회중은 모여들어도 코이노니아가 약하다. 벼이삭에 붙어있는 낟알들은 많은데 땅에 떨어져 썩고 죽는 하나님의 씨앗이 적다. 코이노니아의 생명은 소통에 있는데 웃고 떠드는 소리만 요란할 뿐 죽은 자를 위한 헌시는 없다.
밀알의 미덕은 썩어 죽음에 있다. 자신을 깨트려 생명의 마지막 기운을 다 쏟아내면서까지 닫힌 땅을 열고 흙과 바람과 태양과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자멸에 있다. 한 생명을 버려(疏) 보다 많은 생명을 얻는(通) 밀알 정신은 닫힌 세상을 여는 아름다운 소통의 능력이다. 친교의 절정 중의 하나가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이다. 성만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새로운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새 포도주를 함께 마실 날을 기대하는 축제다. 친교의 꼭대기에 주님의 십자가가 있다. 주님의 죽으심은 스스로 밀알 되어 희생 되심이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해, 세상을 향해, 사람을 향해, 따르는 자들만이 아니라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향해서까지 열린 마음이었기에 자신을 땅에 내던졌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 된 친교의 은혜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되었다. 그렇다. 닫힌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낟알은 떨어지지 않는다. 코이노니아는 있어도 공동체적 결집력이 없다. 친교는 반드시 결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 공동체가 하나로 통해서 단단한 결집을 보이려면 개체가 서로를 향해 자신을 열어야 한다. 내 삶을 둘러쳤던 차양을 거두고 가슴을 활짝 열어야 한다. 그 엶의 끝자락에 한 알의 밀이 있다. 웃음의 근원이었던 이삭이 모리아 산에서 번제물로 눕혔던 것처럼 주님도 십자가에 누우셨고 이삭 대신 죽은 수풀에 걸린 수양처럼 만민을 위해 대신 죽으신 주님 예수는 세상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마지막 미소였다.
자신을 여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미소다. 미소는 공동체의 결집력을 상징하는 하늘의 인증서다. 에크만(Paul Ekman)이 발견한 19가지 미소 중에 진짜 웃음은 오직 하나다. 미소다운 미소, 영혼의 달콤한 행복인 “뒤센 미소”(Duchenne Smile)는 그래서 홀로 웃어 외롭다. 모두가 거짓 웃음, 가공의 웃음, 인조 웃음에 가려 있다. 통(通)이 사라진 사귐은 가장무도회에 불과하다. 마음을 열고 서로를 주 받는 통(通)의 영이 없음으로 둥우리를 형성해도 제각각이 모래 알갱이에 불과하다.
얼굴에는 웃음 듬뿍
마음은 우울한 숲이네
길에는 사람 가득인데
외로움은 칼이 되고
산은 높고 바다는 깊어
처마 끝을 훔치는 것은
아직도 부끄러워 낯선 영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