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 소통 공동체를 위한 갈망

  • 입력 2025.10.03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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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크기의 교회를 형성해야 한다. 크고 작은 교회 사이에 불통 현상이 넘쳐난다. 큰 교회는 큰 교회끼리, 작은 교회도 작은 교회 사이에서 단절과 교신 두절의 고통을 겪는다. 중간 크기의 교회라 해서 갈등과 분열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어느 사이즈의 교회라 할지라도 문제 발생은 언제나 가능하다. 굳이 크기를 얘기하는 것은 건강한 교회 형성에 모든 역량을 결집하자는 취지에서다. 통합과 일치를 노래하는 교단과 교파 사이의 불협화음은 교회의 소통에 근본적인 장애가 있음을 알려준다. “대면공화(對面共話)하되 천산심격(千山深隔)”이란 말처럼 귀를 울린 말이 마음에 울리지 못한다. 얼굴을 마주 대하고 서로 얘기를 나누어도 마치 천 개의 산이 가로놓인 듯한 거리감이 있으면 대화는 불통이다. 들어도(hearing) 경청(listening)이 안 된다.

우리의 익숙한 대화가 그렇지 아니한가! 셀 수 없는 많은 대화 속에 통(通)해서 살아남은 말이 없다. 대화의 형식을 갖추지만, 대개는 독백의 수준에도 못 미친다. 대화에 원기가 사라졌기에 그렇다. 영혼에 생명력이 소진된 까닭이다. ‘날카로운 경청자’ 플라톤은 <대화>를 통해 흙 속에 묻혀 있던 스승의 언어를 세상에 들려주었다. 그가 스승 소크라테스와 얼마만큼 진지한 대화의 시간을 보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아는 것은 그가 스승과 나눈 대화 중심에 있었고, 대화의 깊이를 통했고, 그것이 스승의 삶과 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스승과 나눈 대화 내용은 철학적 이해와는 상관없이 인간 생활의 저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이 원만한 소통을 통한 스승과의 정신적 교감이 없었다면 죽은 자의 고유한 가르침이 기억을 통해 되살아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원시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교회의 생기 있던 대화들이 언제부터인가 묘비를 사이에 두고 나누는 죽은 자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세상의 부를 양 손에 거머쥐느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그 권세와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옛적에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통했는데 이제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통하는 것이 없다. 이전에는 성경으로 통했는데 귀를 간질이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영혼을 낚아채고 있다. 예수의 이름이 운위되고 성경의 말씀이 정확히 인용됨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역사가 뒤따르지 않는다. 제자들이 전해진 예수 이야기는 복음이 되어 닫힌 세상을 열고 아픈 세상을 어루만질 소통의 능력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오늘의 제자급에 속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생동력 있게 재현하지 못하고 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교회의 머릿돌에 이마를 찧으며 통곡함으로 잃어버린 그리스도의 권위를 회복시켜야 한다. 이름에 감추어진 권능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말씀에 운행하는 성령의 기운을 활기차게 해야 한다. 성령은 소통하는 능력이다. 삶의 중심이었던 주님을 잃어 소통의 능력을 상실한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회복된 소통의 힘으로 스승의 가르침과 삶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었다. 오늘의 교회 역시 성령 외에는 방도가 없다. 오순절로의 회귀는 단순히 기억의 차원을 넘어 실제 경험의 세계로 돌아가자는 말이다. 가슴을 치고 마음을 찢으며 무너진 교회의 담벼락을 재건해야 한다. 상한 지체를 도려내고 썩은 피를 쏟아야 한다. 거룩하신 주님의 보혈로 피 갈이를 해야 한다. 건강한 교회를 회복해야 한다. 웨슬리가 추구하던 “교회 속의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 작고도 강건한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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