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 중보관

  • 입력 2025.09.29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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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기념관이 중보관인데 일곱 건물 사이의 중간에 지어졌다. 영적 전쟁에서 중보가 차지하는 중요도를 감안하여 기념관 중앙이라는 상징적 위치가 중보관에게 할당되었다. 중보관에는 성경과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걸출한 중보기도자의 면면을 새겼다. 중보는 무너진 성벽 틈새를 막아서서 죄인을 대신해 하나님이 내리실 심판의 비와 재앙의 불을 유예시키는 고도의 기도 행위다. 악령들이 숱한 격전을 통해 천군의 위용과 능력을 알아 대처하지만 지상의 중보자들에 대한 정보 부족으로 여러 차례 곤경에 빠진 경험 때문에 이만저만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아니다. 요격이 힘든 저고도의 순항미사일처럼 지상 교회의 사면팔방에서 날아오는 중보기도는 예측할 수 없어 악령들에게는 공포 대상이다. 중보자 신드롬은 악령들의 최대 현안이다. 엘리야가 탈진에 힘겨워할 때 중보자 칠천의 존재는 하나님의 자존심이었다. 종말의 때 지구촌 곳곳에서 부르짖는 중보자의 기도는 함성이 되어 지옥의 터를 흔들고 부르짖음으로 천국의 종을 울린다.

종말의 때 

중보자의 기도가

천국의 종을 울린다.

얍복 나루터의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던 장면은 특별 제작되어 독립관이라는 작은 부스를 설치해 따로 전시했다. 그는 출생 비화부터 남달랐다. 누구에게나 이기고 축복의 선두주자가 되고 싶어 온갖 편법을 마다하지 않던 자, 인간으로 유일하게 하나님을 이겼다고 인정받은 자, 그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선민의 직계 조상으로 선택된 야곱은 중보의 한 전형이었다. 그의 삶이 얍복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면 하나님이 어떻게 야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의 황태자로 만드는지 실제 과정을 보며 모두 깊은 감동에 빠져들었다. 아브라함과 엘리야도 중보관의 중앙으로부터 마주 보는 위치에서 입구 정면과 출구 정면에 대칭으로 정돈된 모세와 바울과 더불어 중보기도의 모델로 조명을 받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거주하던 소돔성이 불 심판에서 제외될 수 있기를 하나님과 담판식 중보를 시도했었고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불과 비가 적시에 내리도록 중보하였다. 외로운 싸움꾼인 엘리야는 중보의 최전선에 엎드려 중보의 깃대를 붙들고 있었다.

모세는 자기 영혼이 생명책에서 도말되는 위험을 감수하고 동족 이스라엘의 죄 사함을 중보했으며 바울은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언정 동족의 구원을 위해 중보하였다. 이 두 사람은 중보의 핵심이 사죄와 구원을 위한 것임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그들의 영상이 전송되면 해당 성경 구절이 천국의 언어로 춤을 추며 관람하는 영들의 내면에 각인되고 영들은 즉각적으로 감동의 파장을 내뿜었다. 야베스, 한나, 여호사밧, 다윗, 야고보가 보인 중보 사역도 단편적으로 엮여 전송되었다.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기도의 거장들이 혜성처럼 나타나 중보의 항성으로 제자리를 지키다가 유성처럼 사라졌다. 그들은 중보관에 들지 않았어도 영들의 가슴에 영원한 중보자로 새겨졌다. 중보자로 불리는 이들이 많음은 일단 고무적이다. 그런데 중보의 영 없이 중보 운운하며 중보자의 칭호가 마치 영적 위계인 것처럼 중보하지 못하는 이를 얕보는 무리가 있으니 마음이 아프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무릎 꿇은 중보자로 살아감이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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