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의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세련된 설교에 영혼이 구로하는가? 울부짖는 기도에 성령이 운행하시는가? 사람들은 1만을 외치고 10만을 노래 부른다. 모을 수만 있다면 많이 모으는 것도 귀한 일이다. 교회는 모여야 한다. 모으는 것이 아니라 모여들어야 한다. 흩어지는 교회(ecclesia dispersa) 이전에 모이는 교회(ecclesia congregatia)가 되어야 한다. 인위적인 방편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여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모으기 이전에 성령이 모으시는 그런 회집이 되어야 한다. 펄럭이는 깃발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여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고수가 북을 치고 나팔수가 나팔을 불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교회의 외침이 세상을 깨우기에 충분하면 사람들은 두려워서라도 교회로 모여든다. 시대를 향한 하늘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모인다. 고수나 나팔수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울린 북의 진동과 나팔음의 고저강약이 지닌 의미를 알고자 교회로 모여든다.
언제까지 모여들도록 해야 하는가? 어느 정도 모이면 회중을 흩어야 한다. 교회가 차고 넘치는 것은 축복 같은 재앙이다. 의도적으로 큰 교회를 지향하는 한 건강 의지가 약해질 수 있다. 교회는 생명 공동체이기 때문에 메시지와 지체들의 연락과 상합에 생기가 가득하고 생수가 흘러넘치면 활력을 얻으려는 영혼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의도적으로 중간 크기의 교회를 지향하는 이들은 교회가 회중들로 꽉 차기 전에 흩어버리기 때문에 교회의 공간은 늘 넉넉하다. 웨슬리가 시도했던 ‘교회 안의 작은 교회’(ecclesiolae in ecclesia) 운동은 건강한 교회를 위한 좋은 비책이다. 큰 교회는 스스로의 덩치를 근육질로 단단하게 만들면서 흩은 교회들이 역시 작은 모임들이 모여드는 공동체로 설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언제나 원형은 원주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에 있다. 핵심이 원형이다. 방주의 여덟과 주님의 사도 열둘은 생명력 있는 교회의 원형이 아니던가! 70제자와 120문도의 모임에는 깨어진 영혼들이 모여들었다. 혈연으로 모였든, 지연으로 형성되었든, 학연으로 구성되었든, 밖으로 열린 통(通)의 공동체에서 그들은 새 가족이 되었다. 이방인도, 유대인도, 종도, 자유인도, 소통자(疏通者)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통했다. 막힘이 없기에 영혼과 삶을 함께 나누는 코이노니아로 충만했다. 그리하여 천상에서 지상에 내리꽂힌 거룩한 공동체는 세상이 나눌 수 없는 결집력으로 뭉치고 뭉쳤다.
오순절에 이르러 성령이 임하자 모인 무리에게 능력(dynamis)이 나타났다. 외부로 발산되는 성령의 능력(dynamite)은 내부로 수렴되는 역동력(dynamics)과 함께 개인과 세상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개체 인간이 불씨가 되고 핵이 되어 주변에 불을 붙이고 폭발을 일으켰다. 한 사람이 둘이 되고 둘이 여럿을 이루면서 하늘로부터 점화된 거룩한 능력이 불길처럼 주위 사방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핵과 핵이 융합되고 융합되더니 창조적 분열을 일으켜 세상을 뒤집었다. 진동치 못할 나라를 상속받은 부동의 반석들이 진동할 나라들을 정복하고 천지를 복음으로 뒤흔들었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창조 공동체요 구원 공동체며 생명 공동체였다. 무엇보다 그들은 소통 공동체였다.
그들은 시작하면서 창조와 구원의 완성인 종말을 꿈꾸었다. 쇠하지 않는 생명의 마그마를 가슴에 품고 종말을 앞당겨 살았다. 그들이 바라는 삶의 장(場)은 그들이 발 딛고 있는 세상이 아니었다. 물 위에 뜬 기름처럼 세상에 있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이질적 존재로 살아갔다. 그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구하지 않고 소통하는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세상에 머물렀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새로운 세상, 미래에서 현재로 다가오는 영원한 세계,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듯 인간이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비하와 승귀의 신비로운 세상이었다. 피안(彼岸)이 없다면 차안(此岸)의 삶은 동물적이다. 종말이 확실치 않은 구원은 무가치하다. 교회 안에서 신자가 갖는 종말의 소망이야말로 역동성의 원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