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게 4시간짜리 말씀에 푹 빠져 보시지 않겠어요?”하고 초대한다면 얼마나 모일까?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의문이 앞설 것이다.
그런데...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말씀토크가 현실로 이루어진 교회 현장 이야기가 실제 어제 경험했다.
듣기만 해도 머리에 쥐가 나며 모두가 지루하여 떠날텐데... 요즘 시대에 가능한 이야기인가?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오늘도 어디로 갈지 갈바를 알지못하고 떠나는 4시간 말씀여정기.
6인 말씀참여자와 청중공동체가 함께 이어가는 4시간 릴레이 말씀토크- 말씀 자체의 위대한 힘의 현장을 스케치해 본다
오늘도 15번째 진행되는 예즈덤 말씀사경회가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치니 정한 시간을 넘어 오후 6시였다
더 진행하는 토크를 강제 스톱으로 겨우멈쳤다. 강제로 멈추지 않았다면 밤을 지새울 분위기다. 누가 모임을 이끌어 가는가? 그것은 말씀 본문자체다. 이것이 예즈덤말씀 사경회의 진행 방식이다.
이 모임은 엄밀히 보면 주인이 없는 모임이다. 큰 시간만 정해졌지 작은 시간테이블이 정해지지 않고 그때마다 이야기가 생성되어 그 이야기가 다음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인도자가 있지만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정해주고 그안에서 자유롭게 질문과 대화가 이어간다. 모두 어디로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신기하게 본질을 향해 이야기를 초점이 모아진다.
신기하게도 하나되는 장기간의 릴레이 경주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4시간의 말씀 이야기가 이어졌다. 더 지속되는 것을 인도자가 강제(?) 마무리하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두세 명 짝들 속에서도 그 이야기는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렇게 하여 세상으로 번져 온지방으로 온지역으로 전파하는 그 이야기의 힘을 상상해 보자. 놀라운 이야기다. 이것이 예즈덤말씀사경회의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다.
이 특별한 이야기의 힘은 특별한 한 사람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닌 6명이 함께 만들어 낸 작품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여기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면 자기영역에서 평생 수고한 은퇴를 앞두거나 은퇴한 장인들과 같은 분들이다,
우리나라에 유일한 졸업생인 미국 듀크대 바울 신학자. 미국 하버드와. 영국 캠브리지대를 공부한 요한신학자. 독일 헤이델베르그대 기독교윤리학자. 미국 버클리대에서 공부한 구약학자들이 모인 것만 보아도 개성과 특징이 분명한 학자들이 함께하는 것은 결코 쉽지않다. 거기다 한국에서 신학을 하며 20년 넘게 현장 목회하고 연세대에서 조직신학을 전공한 학자이면서 목회자, 또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에서 성경학을 전공하고 현장에서 성경공부 교재를 300여 권을 펴내고 30년 넘게 가르치고 있는 성경 전문사역자 등의 조합은 퍼즐로 쉽게 맞추기가 어려운 구조다. 특히 이것은 세계의 신학이 한국의 신학과 교회 속에서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신학으로, 학문으로. 배경으로, 경험으로, 경륜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다양한 것이 4시간 동안 하나를 이루어 갈 수 있는 힘은 오직 말씀의 능력이다. 학교와 학문과 교회와 신앙이 일치를 이루어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내는 힘을 현실로 증면한 셈이다.
모두가 자기 것을 내려놓고 이야기의 핵심에 함께 빠져드는 무언가 모르는 그것에 순종하는 신비로움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학문이 신앙으로. 지식이 지혜로, 강연과 설득이 이야기와 대화로, 지루함과 의무감이 즐거움과 참여함으로 바뀌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경험하게 한 이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그것은 말씀 자체와 성경 텍스트의 힘이다
그런데 왜 신학교에서 성경을 몰아내었다. 성경은 교회에서도 설교가 주도하고 있으며 어느 날 시녀로 밀려나 있는 신세다. 성경은 어디서도 홀대받는 추세가 되어가고 있고 젊은이 시대에서는 고루하고 따분하고 가장 재미없는 지난 구물처럼 되어가고 있다.
어디서도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의 힘을 다시 찾아야 한다.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말씀의 힘을 보다 많은 사람에게 경험할게 할 수 없을까?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무시당하고 세상을 만든 말씀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가치절하하며 말씀을 떠나는 이 시대에 예즈덤 말씀사경회의 이런 시도는 새로운 종교개혁의 움트는 새싹이 되길 소망한다.
신학교 강단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 경험은 누가 배우게 한 것일까? 대학자들임에도 어린아이처럼 자기의 낮아짐과 실패를 이야기하면서 기뻐하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고백의 현장은 누가 만든 작품일까? 함께 참여한 청중들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영화 속에 들어간 것처럼 함께 공감한 긴 시간을 어디서 경험해 볼 수 있을까?
우리의 주일예배가, 성경 공부 모임이, 기도회가 이렇게 될 수 없을까? 이런 예배를 주님께 드린다면 어떨까?
그것은 요한복음 11장 1-44절의 본문의 힘으로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본문의 위대한 힘, 말씀 자체가 지닌 위대한 힘이 만든 것이다. 이 말씀이 한국교회에 번져 나가길 소망한다.
누구나 이 힘을 부여받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가 말씀을 듣고 무덤에서 나와 살아난 것처럼 교회와 가정과 신학교와 일터가 다시 살아날 소망을 기대해 본다
그러나 그 위대한 말씀의 힘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그것은 누구인가 한사람과 작은 말씀 모임으로부터 조용히 시작된다.
작은 마구간에서 조용히 세상에 오신 주님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