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교장직을 사퇴하면서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맥큔 선교사

  • 입력 2025.09.25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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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433) - 구약성경과 선교 이야기 (245)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바타흐티 베헤세드 엘로힘 올람 와에드)”(시52:8).

경기가 안 좋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변화에 호응하며, 전에 없던 정부의 지원 민생회복기금에 환영하는 것 같다. 한편, 국가 재정의 빚이 늘어가는 것에는 걱정의 소리를 내는 것도 보게 된다. 우리 삶에서 어려운 사망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시편 52편에서는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라는 표제어를 말한다. 시편 52편은 폭력을 사랑하는 사람의 결말을 말하고 있다. “(다윗의 마스길, 영장에 따른 노래)포악한 자여 내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와이오에메르 로바 다위드 엘 베트 아히멜렉 마 티티하렐렐 베라아 학기보르 헤세드 엘 콜 하욤) ”(시52:1).

시편 52:1-4절은 예언자가 사용하는 예언 질책의 형태를 가지고 표현하고 있고, 5절은 그로 인한 미래의 징벌의 위협을 말하고 있다.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살아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웨이사하카 메오헬 웨세레쉐카 메에레츠 하임 셀라)”(시52:5). 시편 52편은 자신의 인생에서 인생의 삶의 결과를 말하며 인생 후반부에서 이를 보이며 삶의 목표를 어떤 것을 두고 살아왔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리 나타나는 것을 본다. 6, 7절은 의인의 결과와 대비되어 말하고 있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힌네 하게베르 로 야심 엘로힘 마우주 와이베타흐 베로브 아쉐로 야오즈 베하와토)”(시52:6, 7). 8, 9절은 결론부로 감사의 맹세와 신뢰의 확신을 보여 주며, 탄식의 주제를 말하며 뒤에서 감사를 표현하여 그 전형적으로 바뀐 경우를 보여 준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와아카훼 쉼메카 키 토브 네게드 하시데이카)”(시52:9).

결국 경건한 사람들의 공동체, 제사장들의 위치가 중요함을 말한다. 다윗에 반대한 도엑(삼상 22.9)을 비난하는 이 시는, 유대 성전을 언급하며 다른 상황을 질책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악한 자의 저주와 공동체 추방의 목적은 언약 공동체의 행동과 의식적 율법에 근거하여 회중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 여호와의 언약 공동체는 종교적으로 유대교의 시대가 아니라 아마도 포로기전 시대를 말하고 있다(아더 바이저). 이 시에서는 악한 사람들의 모습이 포악자, 악한 계획자, 심한 악한 혀, 날카로운 삭도와 같은 간사한자, 선보다 악을 사랑함, 거짓을 사랑함 등을 말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의 이유가 어떨 때는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시편의 냉소적이고 분노적인 표현의 악한 행위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에 기인하는 것을 보게 된다.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와 그들의 적대적인 행위들이 이 시편 52편 전반부에서 묘사되고 있다. 5절은 죄의 징벌의 필요성과 비난에서 그 위협과 저주가 그로 말미암은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6-7절은 시편 기자의 마음의 행위가 의인들의 여호와 공동체의 신실함에서 결정적인 하나님의 개입에서 비롯된다. 8-9절은 시편 기자가 하나님에게서 그 신뢰가 근거하고 있고, 그 사람의 왜곡된 행동과 대조되어 나타난다. 제의 공동체에서 시편 기자의 신뢰, 하나님의 궁극적인 도피처, 참된 삶, 행복의 충만한 삶 등을 이야기하며 거짓되고 간사한 사람들의 교만한 힘과는 대조를 이룬다. 시인의 경험 속에서 기쁨은 겸손한 마음을 느끼게 하고, 폭력자의 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인식에 있음을 말한다. 경건한 사람들의 공동체의 증언과 그 기도하는 공동체에서 큰 바람은 여기서 하나님 이름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 제의 공동체에서 그 선함으로 행하며 삶의 체험에서 나타나게 된다(시 22:22. 25).

이 시편 52편은 공동체에서 한 개인의 거취와 그 결과를 보면 자신의 행동을 살피게 한다. 이는 공동체 내에서 반성케 하며 자신을 돌아보게 하며 이끄는 악인과 폭행자의 모습을 보며 회개하게 한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하바베타 라 미토브 쉐케르 미다베르 쩨데크 셀라)”(시52:3). 인간의 악성과 남 말하기 좋아하는 속성과, 죄의 근성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쉽게 노출되어 살아가게 한다.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아하베타 콜 디브레 바라 레쇼 미레마)”(시52:4). 이 시편 속에서 세상과 악한 사람들의 행태를 살피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온전한 것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대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세상 사람들과 경건한 사람들의 다른 인생 속에서, 우리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의 삶을 살아간 선교사를 본다.

맥큔 선교사(1873-1941)는 1873년 미국 펜실바니아에서 태어나서 12살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피츠버그 은행의 점원으로 일한다. 그는 22살에 가정을 돌보다가 파크 킬리지를 졸업하고, 피크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석사를 학위를 하고 아이오와주, 코에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교육 심리학을 교수하였다. 그는 1904년 파크대학 설립자 맥아피의 딸 헬렌 맥아피와 결혼하고 1905년 9월 선교지 평양으로 오게 된다. 윤산온(맥큔) 선교사는 일제시대에 배일적이면서 친한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일제 헌병과 경찰에 주목과 감시를 받았다. 한일병탄 1909년 12월 헌병대의 기밀 문서에서도 “그곳(평양) 기독교에서 합방에 대해 가장 반대의견을 가진 자는 장로교 미국인 선교사 이길함과 마삼열, 소안륜, 방위량, 편하설, 윤산온, 우월씨 등이라고 들었으나 그들은 아직 행동상으로는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보고 하여 맥큔 선교사가 한일병탄에 반대한 선교사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조지 새넌 맥큔 선교사는 “양심적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학생들에게 시킬 수 없다”는 교육 철학과 신사 참배 거부 운동 등에 신앙의 양심을 지킨 선교사였다. 신사 참배 강요를 하던 1935년 11월 14일 평남 중등학교장 회의에서 야스타케 지사는 회의를 개최하기 전 평양 신사에 참배하고 나서 회의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숭의여학교 교장 대리 정익성, 순안 의명학교 교장 리희만과 함께 그런 일은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상 그 지시에 따를 수 없다고 거부하였다. 맥큔 선교사는 강제 폐교의 위협을 불사하면서 긴급 전보로 선교부 실행위원장 홀드크로프크(허대전) 선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홀드 크로프트는 11월 24일 평양에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심도 있게 의논하였지만 결론 내지 못하고 미국 뉴욕 선교 본부에 스피어 총부에게 파송하여 주도록 요청하여 이 상황을 보고한 후 대책을 마련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다음 날 실행위원장 홀드 크로프트는 베커 선교사와 함께 야스타케 평남 지사를 방문하여 숭실학교, 숭의여학교와 같은 학교 교장의 신사불참 문제에 관하여 학교와 학교장 측의 정식 회답 제출을 1936년 9월 무렵까지 연기해달라고 신청하였다. 그리고 바로 서울로 올라와 같은 날로, 실행 위원들이 연명하여 북장로회 조선 선교부 실행위원회 명의로 우가키 총독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순서대로 맥큔 선교사, 당시 학생들의 신사 참배 모습,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순서대로 맥큔 선교사, 당시 학생들의 신사 참배 모습, 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신사 참배 문제는 평양 선교사들에게는 신앙의 양심을 지키는 중요한 문제였다. 홀드 크로프트는 12월 7일 우가키 총독에게 편지를 보내 총독이나 총독부 관리들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12월 9일부터 13일까지 서울에서 선교부 실행 위원회를 열어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한국 목회자들도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회신을 보내도록 교장에게 권고하고, “평양학교와 관련된 상황이 심각하다”는 취지의 전보를 해외 선교부에 보내기로 하며 당국자와 협상하기 위해서 로드(노해리), 솔토(소열도). 홀드크로프트 3인으로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선임하였다. 이 위원회에서 장문의 편지를 보내서 신사 참배 유보의 선처를 호소하였다. 맥큔 선교사도 12월 13일 야스타케 평남 지사에게 최종적인 회답 유보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야스타케는 이러한 요청을 거절하는 의미로 회답을 돌려 보냈고 신사 참배를 강요하게 된다. 맥큔에게 숭실전문학교 교장직에 경고하고 와타나베 학무국장은 12월 30일 홀드크로프트, 솔토 숭실전문학교 교장 선생을 학무국으로 불러 신사 참배에 따르도록 설득하고 경고하였다. 이에 따라 맥큔 선교사는 12월 20일 숭실학교 교장직 사퇴서를 제출하였다. ‘너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제목으로 1938년 1월 프데스 비테리안 트리분 지에 신사 참배 반대에 대한 글을 게재하였다. 신사 참배 순응을 주장하던 언더우드와 논쟁하면서 신앙의 강직성과 다니엘의 신앙 전통을 고집하였던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바로 이러한 일제의 신사 참배와 대립하면서 선교를 이끌어가야 했다. 그러나 문화 선교의 차원에서 선교사는 복음의 유지와 성도 보호를 위해 일본 당국자와의 어느 정도 타협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시대 교회는 다니엘과 요한 계시록의 핍박 상황에서와 같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묵시문학적 상황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한국 교회가 핍박을 견디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오늘의 교회 형세를 이루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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