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신배 박사】 베어드 사랑방에서 시작한 숭실학당

  • 입력 2025.10.09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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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신배 교수의 구약 이야기 (435) - 구약성경과 선교 이야기 (247)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박신배 교수 / 연세대 구약학 박사, 현 강서대 교수, 창조문학 편집위원, 한국 평화학회 전 부회장, 한국 구약학회 전 부회장, 강서대 전 총장

“시온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줄 자 누구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예슈오트 이스라엘 베슈브 엘로힘 쉐부트 암모 야겔 야아콥 이스마흐 이스라엘)”(시53:6).

가을 축제, 우리의 한가위 추석이 다가오면서 국력이 좋아져서 세계 경제 강국 5위권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행복지수나 만족도는 높지 않다. 그래도 이를 통해 세계 선교 강국 1위으로 도약을 하고 또 가화만사성의 축복이 온 국민들의 가정에 넘치기를 기도한다. 시편의 세계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는 삶의 과정을 잘 보여주며 신앙 세계에서 주님을 만나며 살아가는 기쁨을 알게 한다. 시편 53편은 시편 14편과 똑같이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시편 주제를 다루고 있고 내용이 똑같다. 이는 시편 기자의 의도적인 편집일까.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경고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아메르 나발 벨보 에인 엘로힘 히쉬히투 웨히트 이부 아웰 에인 오세 토브)”(시53:1).

시편 14편은 내용이 같지만 어리석은 자의 실상에 대하여 그리고 시편 53편은 어리석은 무신론자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똑같다. 표제어 <다윗의 시, 음악 인도자에 따라> 불리어진 노래이다. 이는 본래의 원문이 시편 14편에 보다 잘 보존되어 있는데 예언자들에게 독특한 형태로 사유되고 말하는 방식에서 여러 가지 관점을 불러일으킨다. 시편 53편 1-3절 전반부는 사악한 사람들에게 시험과 핍박을 당해서 상실의 탄식을 말하고 4-6절은 사악한 사람들을 질책하는 주제를 다룬다. 5-6, 7절은 그러한 위협의 결과를 말하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을 시편 기자는 말함으로써 결론을 이끈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는 곳에서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너를 대항하여 진 친 그들의 뼈를 하나님이 흩으심이라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으므로 네가 그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였도다(키 엘로힘 파자르 아쩨모트 호나크 ”(시53:5). 강한 자들이 핍박으로 의인이 고난 받는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고 통치자에 대한 핍박을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을 말한다(사 5:8이하; 렘 5:12이하).

“죄악을 행하는 자들은 무지하냐 그들이 떡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도다(오켈레 암미 아케루 레헴 엘로힘 로 콰라우)”(시53:4).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론과 논리, 사유체계에 따라 죄를 짓는지도 모르고 악령에 들려 살아가면서 하나님은 전혀 찾지 않는다. 이는 시편 53편은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쿨로 사그 야헤다이오 네에라후 에인 오세 토브 에인 감 에하드)”(시53:2-3). 하나님이 인간을 찾으시지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짓고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형상이다. 이러한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죄성을 가지고 살면서 어리석은 사람의 속성대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모습이다. 믿음은 이러한 죄성을 넘어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구하며 기도하며 신자는 부르짖는 영성으로 나간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지 않을 뿐 더러 순종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으며 인간의 무능을 넘어서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찾는다. 하나님은 경건한 신자는 부지런히 돌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을 마주하려고 한다.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인 것을 알고 온전히 주님께 시선을 집중한다.

시편 53편은 6절로 끝나지만 시편 14편은 7절로 끝난다. 이 한절이 추가된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베슈브 엘로힘 쉐부트 암모야겔 야아콥 이쉐마흐 이스라엘)”(시14:6). 이 어리석은 자에 대한 현명한 계획은 이기적인 계획을 무산하게 하고 하나님은 무죄한 자의 피난처가 되시며 시편 기자는 예언자처럼 행동하며 악한 행위자는 진리를 거스리며 행한다. 인간의 죄성은 드러나고 드디어 하나님의 실재에 의해 다투게 된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원받고 힘든 고난의 과정을 겪으면서 시편 기자의 신앙을 통한 의인의 운명은 새 지평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를 통한 구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예루살렘 언약 제의의 갱신을 통한 하나님의 백성의 경건한 공동체가 구원의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이 시편에서 신앙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을 통해 믿음이 세워진 것을 표현한다. “이스라엘이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미 이텐 미찌온 예슈아트 이스라엘)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14:7).

베어드 선교사와 평양 숭실학당
베어드 선교사와 평양 숭실학당

힘든 삶을 살아갔지만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는 인생’처럼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분이 계시다. 윌리엄 마튼 베어드 선교사(1862-1931)는 평양의 숭실중고등학교와 숭실대학교 모태가 되는 승실학당을 설립한 설립자이다. 윌리암 베어드는 스코틀랜드 교회 집안에서 태어나서 미국에 1810년 필라델피아 도미 후 테네시주, 오하이오주, 켄터키 주를 전전하다가 신학교를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콜로라도 델노트에 있는 소형 교회를 목회하였다. 그는 경제적 이유로 해외 선교 사역을 바로 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연세대를 세운 언더우드의 형이자 타자기 회사 사장인 존 언더우드가 한국에 파견되는 선교사의 봉급 지급을 제안한다는 소식을 사무엘 모펫이 듣고, 베어드에게 편지로 알려서 베어드는 자신이 있던 델 노트 대학 학장을 그만두고 하노버 대학의 동기였던 애니 로리 애덤스와 결혼하고 동시에 한국 선교사로 자원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 부산에 도착한 후 조선 선교부에서 첫 선교지로 부산에 거주하며 어학 공부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 하디 선교사의 집에 지내면서 허드 영국 영사의 도움으로 선교부 건물 부지를 구매했다. 부산 선교 지부를 설립하고 순회 전도 여행, 사랑방 서당, 기독교 서적 번역, 대구 선교부 설립, 초량교회 설립 등을 하며 선교 사역을 진행하였다. 베어드 선교사는 우리의 교육정책을 입안하였고 1897년 평양으로 파송되었다. 평양은 당시에 교세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었다. 평양의 늘어나는 초등학교 졸업생과 교회 들을 이끌 지도자의 중등 교육이 필요함에 따라 선교부는 베어드의 중등 교육반 운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1897년 베어드 사랑방에서 시작한 중등 교육반은 숭실학당의 시작이었다. 숭실 학장은 성서, 지리, 산수, 역사 등을 가르치며 평양 선교부의 선교 활동이 성공적이었고 교회의 재적 인원이 증가하였다. 베어드 선교사는 이에 선교부 지원금과 스왈렌 선교사의 기부금으로 교사를 건립하게 되었다. 베어드는 숭실 학당의 교육 언어를 한국어로 채택하며 미국 중등 교육 교과서를 한국의 실정에 맞게 번역하고 출판하였다. 1900년 대에 들어서며 교회가 연합하는 방향으로 선교가 진행되면서 베어드는 감리회 교회와 연합으로 1906년 합성 숭실 대학을 설립하였다.

베어드는 대학 문제로 인해 숭실대학 교장을 1916년 사임하게 된다. 이후 기독교 서회 편집위원, 성서 공회, 성서 출판 위원등을 역임하면서 주일학교 교재와 성서 번역 등을 하는 문서 사역에 집중했다. 그 후에 베어드 선교사는 불행히도 1931년 장티푸스에 걸려 69세에 나이로 평양에서 별세하게 된다. 그는 독립 운동보다는 기독교 교육 선교에 집중하면서 평양 숭실하교를 키우며 독립운동하는 학생을 키우는 교육자가 되었고, 독립운동의 산실과 그 기반을 형성하도록 하였다. 그는 조선 교육의 정책을 가지고 숭실학교를 조선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그 기조를 가지고 숭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자주독립 사상을 향유 할 수 있도록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였다. 그는 머펫, 스왈렌, 맥큔,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선교 연합을 이끌었다. 좋은 선교사들과 함께 하며 선교 한국을 이끄는 선교사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동방의 예루살렘은 서서히 형성되어 가고 있었고 그 빛이 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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