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안이 언어가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하에타 에후다 레콰드쇼 이스라엘 맘메셀로타이오)”(114:1-2).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열대 지방의 한 나라처럼 더운 여름이 지나가는 것을 느끼는 날이다. 경제는 나쁘다고 하고 연일 보도되는 뉴스는 그리 아름다운 소식이 아니라 우리는 기분 좋고 시원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시편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들의 영적인 출애굽을 가늠하며 해방의 기쁨을 품어야 한다. 영적 출애굽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접과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 것이다. 시편 114편은 출애굽의 사건을 이야기하며 유월절 찬양을 하고 있다. 이는 의식적 축제에서 8일째 불린 노래로써 유월절 축제로 돌아가서 그때에 그 노래를 환원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님의 왕권을 언급하고 있고 또 여호와의 언약 축제를 말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포로기 이후에 실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밀리페니 아돈 훌리 아레츠 밀리페니 엘로아흐 야아콥)”(시114:7). 이 찬양 시편은 모세 시대의 사건을 기억하며 찬양하고 있다. “그가 반석을 쳐서 못물이 되게 하시며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하호페키 하쭈르 아감 마임 할라미쉬 레마에에노 마임)”(시 114:8).
이 시편은 출애굽의 사건을 재해석하고 현실화하면서 오늘에 재현하고 있다. 유월절을 노래하고 축제하는 이스라엘은 이 출애굽 시편을 통해 예배로 나가는 중요한 드라마적 특징을 가지게 된다. 구약의 종교와 백성은 실제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으로서 유월절은 계속 새롭게 하고, 매년 축제의식 속에서 그 전통을 살려 이스라엘 신앙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재현한다. 시에서 유다 왕국과 북이스라엘의 두 나라로 나뉜 것도 언급하고 있다(2절). 출애굽기 114편 1-2절은 출애굽의 사건과 백성 선택을 말하고 있고, 3-4절은 출애굽에 동반된 기적을 말하며, 5-6절은 시의 질문을 포함하고 그 놀라움과 아이러니한 질문을 한다. 이 기적의 원인이 무엇인지 묻는다. 7-8절은 시인이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현현을 언급한다.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찌함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찌함인가 너희 산들아 숫양들 같이 뛰놀며 작은 산들아 어린 양들 같이 뛰놂은 어찌함인가(헤하림 티르퀘두 케예림 게바오트 키베네 쫀)”(시114:5-6).
이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애굽에서 구원 사건이다. 구속사와 이스라엘 민족사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있고 고난의 삶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손길과 구원을 보여주며 모세의 리더십으로 애굽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누리는 이야기를 보게 된다. 이 출애굽이 사건이 짧은 시편 114편에서 위대한 이스라엘과 언약의 제의 신학으로 표현되어 시편에서 녹아 들어가 보인다(1-2절). 출애굽 사건에 동반된 기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준다. 여기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신현현)을 통해 출애굽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적의 요소는 홍해 바다를 갈라지게 함과 시내산에서 계시를 받을 때의 지진이 일어나 흔들리는 것을 묘사한다(3-4절).
시인의 감정의 개입은 5-6절을 통해 나타나는데 아이러니한 놀라움과 요단강의 갈라짐과 바다에게 묻는 질문이나 이상한 행동으로써 산에게도 묻는다. 시적인 표현은 놀라움과 테러의 표현으로, 실제의 유머와 아이러니 등으로 나타내며 자유와 영적인 우월감 등을 표현한다. 이러한 경이로움과 떨림의 경외감과 세계가 흔들이는 하나님의 위엄의 헌신한 기쁨은 구약 경건의 특징적인 특색을 보인다. 7-8절은 통해 마지막으로 시인은 출애굽에 대한 질문에 대답한다. 땅을 부르고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땅의 떨림으로 자연이 주님의 나타나심 앞에 겁을 먹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며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한다. 시편 기자의 우주적 비전으로 표현하고 있고 주의 현존과 야곱의 하나님을 묘사하며 시편 기자의 승리의 즐거움을 보여준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당신의 백성과 나라의 역사를 인도하신다. 이 찬양의 결론은 신앙과 감사가 어우러져 가데스의 샘물에서 기적의 전승을 이야기하며 백성들의 갈증과 목축이는 역사,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기적을 말하며 샘물이 터지는 것, 곧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는 기적은 바로 기적의 위대함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 뿐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은총을 드러내며 시를 끝맺는다.
맥큔(G. S. McCune, 윤산온, 1873-1941)은 67세를 살면서 참다운 선교가 무엇인지 보여준 한국 선교의 선각자였다. 맥큔은 일본에서 이광수를 만난 후에 독립선언서를 보고 랜디스 박사를 소개하고 이광수에게 명함을 건넨 뒤 임지인 선천으로 돌아갔다. 그러던 중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 들른 그는 연희전문학교 학생이자 서울에서 발발한 3.1운동 주동자 중 한 사람인 김원벽과 만나 내외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맥큔은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개척해야 한다”라고 전했고 김원벽은 이에 따라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이후 1919년 3월 8일 선천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나고 일본군과 일본 경찰의 탄압이 일어나자, 맥큔은 목격 상황을 친필로 기록하여 일제 우편 검열을 피하기 위해 캐나다로 여행하는 사람에게 맡겨 캐나다에서 미국 시카고 있던 <컨태넨트> 잡지사로 보내 게재하게 하였다. 그때 컨티넨트 잡지에 실린 1919년 4월 10일 호의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쌍한 대한민국! 능히 한국을 도와줄 수가 없는가? 현급 정형은 참으로 견딜 수 없도다 이 산골(산천국)에서 한인들이 3월 8일에 대를 이어 평양으로 모여들며 ‘독립 만세’를 부르며 평양성 안에 사는 인민의 애국정신을 고취하여 일본이 한국을 그네들에게 돌려줄 때까지 싸움하자 결심하였는데, 이 아래 기록한 사실은 나(윤산온)과 다른 선교사들이 3월 8일부터 10일까지 목격한 것이라.”
1920년 9월 1일 선천 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가 체포된 신성학교 학생 박치의를 변호하기로 한 맥큔은 “온량한 학생으로 결코 폭탄을 던질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관헌들의 고문에 마지 못해 자백했을 것”이라며 고문설을 유포시켰다. 이에 총독부는 그를 극단적인 배일자로 간주하고 강한 압박을 가했다. 이 때문에 맥큔은 신성학교장 직을 물러나야 했다. 그 후에 장남 심장병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1921년 8월 사우스 다코타 주 휴론 대학 학장에 취임하여 7년간 학장을 맡던 맥큔은 1928년 5월 다시 내한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1932년 9월 18일 만주사변 1주년 전몰자 위령제가 평양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평안남도 지사가 학생들에게 참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그는 학생들에게 이를 묵살할 것을 권고했다. 그 후 총독부 학무국은 1935년 10월 24일부터 3일간 각도의 학무과장과 사범학교장을 포함한 시학관들을 불러 회의를 갖고 “국가 관념의 함양에 관한 건, 경신숭조에 관한 건, 국어 사용의 보급 처리에 관한 건, 사립학교 지도 감독에 관한 건, 심전 개발에 관한 건, 교화 사업에 관한 건” 등을 지시하였다.
맥큔은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기독교 교리를 양심적으로 지키려다가 교장 자격이 박탈되었고 1936년 3월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나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정부 선언들은 신사에 참배하는 행위에 대한 나의 양심적인 거부감을 제거하거나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학교 교장으로서의 나에게 요구된 행위를 한 개인으로서 양심적으로 행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개인으로서 신사에 참배할 수 없기 때문에 나의 학생들에게도 그것을 하도록 할 수 없음도 알려드리게 됨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맥큔 선교사는 분명한 신앙 고백을 하며 신사 참배를 거부함으로써 신앙의 양심을 지켰던 것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다 이러한 다니엘, 아모스, 예레미야 선교사 선지자처럼 참된 예언 전통에 서서 복음 전했던 참 선교사, 예언자들이었다.
